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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씨, 문인들 일화모음집 '글동네에서 생긴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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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휴학계를 내고 귀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장 우울했던 시기에 가장 순수한 슬픔만을 가지고 쓴 '무진기행' " (김승옥). "상황이 압력을 행사해 오지 않으면 문학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나" (이청준). "격변의 연대기에는 추(醜)에 미(美)가 있고 그러한 것을 통해 문학이 하나의 항력으로 버퉁길 적에 육성을 드러낸다" (박태순). "나의 한을 풀어줄 유일한 무기는 오로지 문학뿐" (한승원).

60년대 문단에 나와 원숙한 삶의 경지를 펼쳐보이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중진 소설가들의 초창기 자신의 작품 혹은 문학하는 자세에 대한 말이다. 슬펐기에, 세상이 더러웠기에,가난하고 미천했기에 문학에 목 메달았다는 말이다. 문학이란 제단에 자신의 순정한 피와 혼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 문인들의 속내와 행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한권의 책이 나왔다. 문학평론가 정규웅(鄭奎雄.58)씨는 최근 '글동네에서 생긴 일' (문학세계사.8천2백원)을 펴냈다.

65년 중앙일보에 들어와 문학담당기자.문화부장.논설위원등을 거치며 35년간 문학의 현장 한가운데를 지켜본 정씨의 이번 책에는 문인과 문단과 문학의 비밀스런 속내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드러나 있다. 60년 4.19로 열려진 짧은 '젊음의 해방공간' 에서 김관식시인은 기성 정치판에 본때를 보이겠다며 총선 출마선언을 했다.

김시인은 당시 26세. 서정주시인의 손아래 동서였던 그는 김동리.조연현등 대가급 문인들 술자리만 찾아다니며 '김군' '조군' 등 한참 대선배를 '군' 으로 부르며 '그것도 작품이며 글이냐고' 호통치고 다녔다. 선배들은 그를 꺼렸으나 젊은 문인들은 그런 김시인을 보스로 모셨다.

서울 용산에서 장면이라는 거물급 정치인과 맞붙은 김시인은 보기좋게 낙선했다. 온세상을 한번에 깨끗하게 치워버리고픈 순수시혼의 발로이며 곧 4.19 직후 젊은이 세상의 우화로 읽힐수 있다.

1960년은 정치사적으로 보면 학생들의 해였지만 문학사적으로 보면 최인훈의 소설 '광장' 의 해였다. 남.북한의 개인주의와 공산 도식주의를 한꺼번에 비판한 이 작품은 4.19의 자유 상황 아래서도 한밤중에 몰래 인쇄돼 '새벽' 지 60년 11월호에 실리게 됐다. 그 6개월 후 5.16으로 비판적 작품들은 모두 불온문서 취급돼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어 그후 긴 독재체제 아래서의 '지하문학' 의 전주곡을 울린 작품이 '광장' 이었다.

"피의자 천상병은 부산.서울 등지를 배회하면서 무위도식 중인 자로… 수십회에 걸쳐 1백원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67년 중앙정보부는 순수시인 천상병을 이와같은 혐의로 소위 '동백림 간첩단사건' 에 연루시킨다. 서울 상대를 나왔으면서도 일정한 직업 없이 남에게 손내밀어 얻은 돈으로 술마시고 시만 쓰다 죽을 때도 천상 갈 여비인 부의금을 태워먹은 천시인의 그 무소유의 순수까지도 간첩혐의를 씌웠던 독재정권의 코미디. 사사로운 표현 하나 맘에 안들어도 가두고 고문했던 폭압의 시대를 살면서도 문인들은 행복했다.

진짜 보다도 더 진짜 같은 가짜 황석영이 나타나 문학청년들을 매료했던 일, 신춘문예 응모할때 당선소감까지 같이 써보낼 정도로 당당했던 '어린' 최인호씨, 6.25피난 시절 껌을 팔아야했던 황동규시인 등 문인들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도 이 책 속에는 많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문단에서의 자리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책속에서 문학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더러운 시대와 사회를 정화하려는 문인들의 순수혼, 지금도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밤새워 작품을 가다듬고 있을 첫눈처럼 새하얀 문학의 초발심이다.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억압 받던 문학은 그래도 어두컴컴한 다방에서, 주점에서 행복했었다. 너희들의, 사회의 어둠을 문학의 이름으로 밝히겠다며. 이게 어디 문학만의 것이겠는가.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의 마음 자리에 지금도 그런 순수초발심이 남아있지 않은가. 해서 '글동네에서 생긴 일' 은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지금도 저지를수 있는 죄없는, 자유와 가치를 향한 일들일 수도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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