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천민문화 청산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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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 원로 정치학자가 "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영남의 아전(衙前)문화"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흥미로운 관찰이라 생각했다.

오해가 없도록 미리 말하면 그는 영남에서도 북쪽 출신이고 누구보다 애향심이 강한 분이다. 그가 말하는 영남 아전문화가 다른 지역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으나 일반적인 아전들의 행태에 지역적 특성이 결합된 것을 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발언의 취지는 우리 사회의 천민화(賤民化)경향에 대한 우려였다. 60년대 이후 경제발전 지상주의가 필연적으로 키워낸 천민자본주의 의식과 행동양식의 연원을 특정하위문화에서 찾은 것이다.

그의 시각이 꼭 옳은지는 검증의 대상이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알려진 대로 영남은 고급 정신문화의 전통이 오래고 깊은 지역이다.

풍류도로 집약된 고유신앙에서부터 신라.고려의 불교문화를 거쳐 조선조의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오롯한 전통을 가꿔왔다.

가까이만 해도 조선조 중기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愰).남명(南冥) 조식(曺植)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의 학맥과 활동은 시대의 양식이었다고 할 만큼 고상하고 진지하고 순수했으며 수준이 높았다.

세계 지성사에 한 장을 차지해 손색없다. 그 사상적.문화적.윤리적.규범적 전통에 오늘의 모습을 비춰 본다면 어떨까. 너나 없이 자괴감을 가질 것이다.

부의 축적과 감각적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오늘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올의 가책 없이 신의와 진실을 저버리고 미래의 싹조차 서슴없이 자르는 가치전도와 의식의 혼돈.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마저 지연.학연으로 패거리를 지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함에 금기가 없고 음해와 모략까지 능력으로 여기는 듯한 풍조 앞에서 성(誠).경(敬).예(禮).양(讓)의 고급스런 정신문화 전통을 떠올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거의 한 세대 이상 우리 사회가 휩쓸려온 의식의 흐름은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관계없이 소중히 지켰어야 할 긍지 높은 문화와 전통에 대한 반역이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시민의식의 천민화를 걱정하면서 그 정치학자가 굳이 '영남 아전' 을 거론한 배경은 그런 역사성에 있을 터이다.

전통의 고급문화가 실종 내지 말살된 빈 자리를 저급문화가 차지했고 그것이 시간과 함께 확대.심화되었다는 그의 진단은 요즘 혼란스런 정국과 사회상 앞에서 새삼 실감으로 다가온다. 크고 작은 여러 사건에서 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원초적으로 지금 우리가 벌이는 소동들이 과연 그럴만한 것인가. 왜 이런 일들이 이런 식으로 벌어져 꼬리에 꼬리를 무는가. 위도 아래도 없는 혼선과 갈등을 보면서 시대전환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아전문화의 핵심은 빙공영사(憑公營私), 호가호위(狐假虎威)에 있다. 그들은 수령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실권을 행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윗분의 뜻을, 윗사람에 대해서는 아랫것들을 내세워 교묘하게 핑계를 대고 책임을 떠넘긴다.

윗사람의 권위를 빌려 아래를 누르고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기 위해 못할 일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늘 명분과 공익과 충성을 내세운다. 주인의식이 없으면서 주인 노릇을 하는 모순이 아전문화의 위험성이다.

우리 사회가 이른바 21세기 지식정보사회로 한 단계 도약하려면 이 지난 시대의 유산부터 청산해야 한다. 그 핵심은 각 분야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윤리의 최저선' 을 분명히 설정하고 권력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제도와 전통을 확립하는 일이다.

정치인.기업인.관료.언론인.법조인.의료인.교수 등 리더집단에서부터 권력은 행사하면서 책임은 안 지려는 아전 근성을 벗어야 한다. 아무리 잘못되어도 넘어서는 안될 최저선이 있어야만 사회에 최소한의 신뢰가 유지된다.

최근 국회 일각에서 전문직 종사자의 윤리위반 행위에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특별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시의에 맞는 움직임이다. 처벌이 가혹하다는 지적도 들리지만 충분한 토론을 거쳐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천박한 아전문화가 퇴출된 자리에 고급스런 정신문화의 전통이 부활할 때 한국은 비로소 '후진 개발도상국' 의 딱지를 떼게 될 것이다.

문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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