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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생들 '인형뽑기' 열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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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2일 오후 1시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부근 A편의점 앞. 점심을 컵라면.우동 등으로 간단히 해결하려고 찾아온 고시생들이 유리상자 안에 든 집게를 작동시켜 인형을 뽑아내는 오락기 앞으로 삼삼오오 몰려든다.

고시생 李모(31)씨는 1백원짜리 동전 2개를 넣고 인형을 뽑아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생각과 달리 쉽지 않았다. 또 다시 동전을 넣어보지만 기계 속 집게는 고릴라.코끼리.원숭이 등 아홉 가지 동물 인형을 집어들다가도 아차 하는 순간 떨어뜨린다.

"쉽게 잡혀 나올 것 같은 눈앞의 인형이 떨어질 때마다 '고시' 와 비슷한 기분을 느껴요. 이 동네 고시생들 대부분이 요즘 '인형뽑기' 에 매달려 있어요. 처음엔 심심풀이로 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중독되고 마는 거지요. "

李씨는 "잡힐 듯 말 듯한 인형을 뽑기 위해 한번에 몇 만원씩 한 달에 1백만원 이상을 털어 넣는 고시생도 있다" 고 말했다.

이날 오후 신림동 O만화방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인형뽑기에 매달리던 고시생 朴모(29)씨도 "오늘은 10차례 도전해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점찍어 놓은 원숭이 인형을 뽑겠다" 고 말했다.

전국의 대표적인 고시촌인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최근 인형뽑기 '이상 열풍' 이 불고 있다.

한두 군데 설치한 인형뽑기가 인기를 끌자 이 일대 오락실.편의점.만화방들이 경쟁적으로 이 오락기를 설치하면서 현재 1백여대가 넘어섰다.

일부 고시생들은 인형뽑기의 묘한 흡인력 때문에 중독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시생들에게 인형뽑기와 고시를 동일시하는 심리 상태가 조성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M오락실 주인 金모(34)씨는 "오락기 운영업자들이 수익금을 갖는 조건으로 매달 15만~25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있다. 일부 고시생들은 주로 점심.저녁식사 후에 몰려와 한번에 수십 차례씩 이용하기도 한다" 고 말했다.

3년째 신림동에서 생활해온 고시생 金모(33)씨는 지난 20일 오전 5시30분쯤 인형뽑기 오락기의 동전투입구에 철사 줄을 넣어 2천원짜리 인형 5개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적발돼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이날 오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 고시원으로 돌아가던 중 무려 35차례에 걸쳐 인형뽑기를 시도하다 실패하자 홧김에 강제로 인형을 빼내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金씨는 경찰에서 "번번이 시험에 낙방해 스트레스가 쌓이던 참에 7천원 이상을 쏟아 부었는데도 인형뽑기마저 마음대로 안되자 술김에 실수했다" 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李那美)씨는 "고시를 통해 출세하려는 욕망을 가진 고시생들이 현실과의 괴리감을 잊기 위해 심리적으로 도피하려는 일종의 '퇴행' 현상" 이라고 진단했다.

중앙대 심리학과 김재휘(金宰輝)교수는 "고시생들이 쓸모도 없는 인형 뽑기에 매달리는 것은 고시합격 대신 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유아적 심리상태" 라고 분석했다.

배익준.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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