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72. 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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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⑦

왜 그랬을까, 장바닥에서 뒹굴었던 승희였다 해서 결벽성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러나 그 몽환적이었던 행각 뒤에는 그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던 의지적인 명분은 있었다. 다분히 자학적이었든 혹은 선택의 졸렬성이 있었든간에, 그 남자와 벌인 행각은 바로 한철규에게 돌아갈 수 없는 의지적인 명분을 쌓으려 했었다는 그녀의 변명이 숨어 있었다.

한철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명징하게 발견하고 싶었다. 평지풍파로 볼 수밖에 없었던 태호와의 반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태호를 떠난 것은 태호와 동행에서 느낀 스스로에 대한 비하감 때문이었다. 매몰차게 한철규를 떠나왔으면서도 철저하게 한철규 곁에 있다는 소속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이 어떤 곳에 흩어져 있든 한철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남자와의 일로 자신이 한씨네로부터 완전하게 격리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김포공항 로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아무리 따지고 살펴보아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감은 잠시였을 뿐,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의 무게가 다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가을의 끝자락에서 계절을 되돌리려고 몸부림치다 붉게 멍든 나무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손수건을 꺼내 눈 가장자리에 묻은 눈물을 훔쳤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어두워지려는 저녁 7시쯤이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대학교 후문과 인접한 장충동 네거리에 도착했다. 이면도로에 촘촘하게 들어선 식당들과 포장마차들은 모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맥주집.카페, 그리고 냉면집, 다시 곰탕집.오락실.국수집.해물탕집, 그리고 맥주집.일식당.카페.밥집.약국, 또 맥주집. 길 건너편엔 즐비한 족발집들. 이젠 눈에 익은 그 이면도로의 풍경들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한동안 처연하게 서서 바라보았다.

길지만 좁은 이면도로의 끝자락에 그녀가 일하고 있는 청해식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생선을 다루고 해물탕을 끓여내는 솜씨가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얻게 된 일자리였다. 그 뒷골목 어디에도 바다의 이미지를 연상시켜 주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식당으로 일을 나간지 닷새만에 자신이 해물탕 끓이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는 그토록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바다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서울 뒷골목에 숨어 있는 식당에서도 바닷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애환은 끊임없이 들려 왔다. 지금은 동해 연안은 물론이었고, 서해 연안에서까지 무더기로 오징어가 잡히고,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수역에서 잡혀 반입되는 오징어까지 급증해 갑자기 값이 폭락하고 있었다.

청해식당에 단골로 활어를 배달해 주는 해물장수도 요사이는 오징어만 가져왔다. 그 활어장수가 식당으로 들어서면 술청은 온통 비린내로 가득 찼다. 말수가 적은 어물장수가 잰 걸음으로 술청을 가로질러 창가에 있는 수조에 활어를 꽐꽐 쏟아부울 때마다 역기를 동반하는 물비린내가 물씬 콧등을 스쳤다. 그런 땐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있던 응어리같은 것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주인과 계산을 마치고, 도어를 드르륵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활어장수의 널찍한 어깨에서 승희는 때때로 박봉환의 얼굴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런데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았다. 이 세상 어디로 도망한다 하더라도 바다로부터 숨어버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녀는 이른바 주방장 대접을 받고 있는 청해식당으로 들어섰다. 이틀 동안 혼자 진땀을 흘렸던 주인이 꽥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조리대에 섰다. 활어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수조의 유리벽에 초췌한 모습의 그녀가 흐릿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 찾아온 곳은 결국 영동식당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좁은 식당의 조리대 앞이었다. 그녀는 정갈하게 씻긴 도마 위에 가로 누워있는 회칼을 가만히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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