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안중근 의사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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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은 안중근(1879~1910) 의거 100주년이 되는 날. 안중근을 평화사상가로서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도 한·중·일 동양평화를 희구했던 담대한 사상가로서의 안중근을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중근 의거 100주년 남북공동 선언문’을 접했다. 남측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와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 명의다. 다음은 선언문의 일부.

“안중근 의거 100년을 맞는 우리들은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의 고통을 청산하고 평화번영의 자주통일 조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민족적 결의를 다짐하자는 호소문을 7000만 겨레에게 보낸다.”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바탕으로 자주적이며 평화로운 남북의 민족대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중근 정신 계승에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끌어들였다. 내년 3월 26일(안중근 의사 순국일)까지 ‘안중근 의거 기념 반일 공동 투쟁기간’을 선포할 것도 촉구했다. ‘자주통일’ ‘외세의 압력’ 등은 북한이 써온 상투적 문구다. 북측의 조선종교인협의회는 지난 6월 ‘남조선 종교인’들에게 “리명박 반역패당을 하루 속히 쓸어버리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새 력사를 창조하기 위한 거족적인 투쟁에 적극 떨쳐 나서라”고 촉구한 단체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평화번영의 자주통일 조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권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게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속내는 아닐지…. 국권침탈 100년이 되는 내년을 기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성의 있는 사죄를 하길 바라는 건 이 두 단체가 굳이 촉구하지 않아도 이미 ‘7000만 겨레’의 뜻일 게다. 하지만 거기에 ‘남북 반일 공동투쟁 기간’까지 선포하자고 나서는 게 지금의 세상에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100년 전의 ‘투쟁 정신’도 좋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의 ‘국력’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윤원일 사무총장은 “초안은 북측이 작성해 보냈고 몇몇 단어만 고쳤다”고 말했다. 북한은 안중근을 ‘렬사’라고 부르고 ‘의거’를 ‘장거’라고 한다. 이런 남북 간에 이질적인 몇몇 표현만 고쳤을 뿐 전체 내용과 다른 단어는 북한 측이 써 준 원고 그대로다. 이 두 단체는 개성이나 금강산에서 안중근 의거 기념 남북 공동대회도 추진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자칫 안중근 의거를 기념한다며 북측이 즐겨 쓰는 정치적 선전·선동 구호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 동양평화를 꿈꿨던 그의 ‘담대한 희망’이 남북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이념적 이해관계에 동원돼선 안 될 것이다. 100년 전 동아시아의 평화사상가를 100년 뒤의 후손이 당대의 정치적 구호로 이용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배노필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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