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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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는 지금도 총성이 울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악수할 날은 언제 올까. 1000여 년 전 하느님과 알라의 이름으로 칼과 창을 휘둘렀던 기독교와 이슬람은 여전히 날을 세우고 있다. 성경과 코란에서 강조되는 평화와 사랑은 핏빛 현실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역사를 거슬러 12세기 예루살렘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크게 내쉰다. "과연 신은 있는가" "있다면 누구를 위한 신인가" 등의 질문이 계속된다. 종교라는 이름의 처참한 살육극에 물린 주인공 발리안(올랜도 블룸)은 "신이 있다면 알아서 하겠지" 식의 신성모독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킹덤 오브 헤븐'은 서구 기독교인에겐 다소 불편한 영화처럼 보인다. 이교도 정복을 명목으로 시작됐던 중세 십자군 전쟁이 배경인데도 십자군의 승리를 부각하지 않는다. 십자군은 오히려 이슬람군의 대대적 공격을 받고 '강제적 협상'을 통해 유럽으로 퇴각한다.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할리우드 초대형 서사극임에도 감독은 서구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대신 오히려 종교전쟁의 덧없음을 내세운다. 일종의 모험인 셈이다.

또 당시 이슬람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살라딘이 십자군 장군들보다 멋진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신과 정의를 앞세웠던 십자군 전쟁이 실제론 영토와 재물을 빼앗기 위한 싸움에 불과했다는 해석도 끼어든다. 십자군에 대한 '정치적 공정성'을 시도한 것 같다.

드라마는 단순한 편이다. 프랑스의 미천한 대장장이 발리안이 영주인 아버지(리암 리슨)의 권유로 예루살렘으로 가고, 또 그곳에서 예루살렘 백성을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줄거리다. 당시 예루살렘의 현명한 통치자였던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턴)가 사망하면서 십자군과 이슬람의 화평 관계가 깨지고, 십자군에 주전파가 득세하면서 양측의 대규모 전쟁이 재연된다. 그런 와중에 발리안이 이슬람에 맞서 예루살렘을 사수한다.

발리안은 서사극에 나오는 영웅들과 성격이 판이하다. 출신이 고결한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신의 명령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을 따르는 그의 소명은 어려운 백성을 돕고 지켜내는 것. 그에게 종교는 허울에 불과하다. 리들리 스콧이 보는 21세기판 종교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허망함은 참혹한 전투장면으로 강조된다. 감독은 기계 냄새를 지울 수 없는 컴퓨터 그래픽을 절제하고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해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를 연출했다. 뚝뚝 잘려나가는 팔다리, 목을 관통하는 화살, 대지에 널린 시신 등의 아비규환이 영화 중반 이후 줄곧 반복된다. 의도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다. 다만 발리안과 예수살렘의 공주 시빌라(에바 그린)의 치명적 사랑은 어딘가 생뚱맞다. 액션과 멜로가 겹치는 서사극의 구색을 맞추는 수준에 그친 모양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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