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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東道西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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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10월의 주말 필자는 토.일요일 이틀동안 정신없이 뛰었다. 토요일에는 학술발표회에서 하루를 보내고 일요일에는 제자들의 결혼식 주례를 두 번 섰다. 이 양자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공동의 주제로 일관했다.

토요일 학술대회의 주제는 1876년 개항 이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고민들, 개방과 자기보존의 문제였다. 개방의 문제는 개화파와 개화사상, 그리고 갑오경장의 평가문제이고 자기보존의 문제는 한말 의병활동과 갑오농민전쟁, 그리고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의 문제였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그로부터 1세기 후인 오늘날 또다시 개방과 자기보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어려운 처지에 처한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말의 고민이 20세기말의 오늘에 그대로 주요 과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가 미해결로 1세기를 경과했고 아직도 양자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학술대회에서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다음날 일요일의 결혼식장에서 이 문제는 다른 형태로 제기됐다. 오후 결혼식의 신랑이 '19세기 동도서기론의 형성과정 연구' 로 최근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기 때문에 주례사에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됐다.

전날에 미진했던 부분이 있어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례사에서 신랑의 박사논문을 거론하는 것은 파격적인 일인데도 남녀노소의 손님들이 의외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경청하는 데 놀랐다.

19세기말에 있어 동도(東道)란 전통적으로 지켜온 가치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조선의 국학이 성리학이고 그 성리학적 이념이 국시로 천명돼 5백여년을 지속했기 때문에 그 가치관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대부분 지식인의 공감대였다.

선비정신으로 뿌리내려 조선왕조의 시대정신이 됐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의 준거가 됐으므로 서양가치관의 우수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문명은 서기(西器)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대포와 군함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이기(利器)를 배우지 않고는 당시의 세계질서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수한 것은 서양 것이라도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서양기술이라는 그릇에 담자는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 중국에도 유사한 사고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 체용론(體用論)의 틀을 차용해 제기된 바 있고 우리 나라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도기론(道器論)을 차용한 것이다.

모두 유교적 담론의 형식을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일단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입장이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은 지켜나가려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오늘날의 문제도 역시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전환기마다 자기보존논리와 개방논리가 공존했고 양자의 슬기로운 조화로 위기를 극복해 왔다.

세계화는 고려시대 원 제국에 의해 이미 경험한 바다. 그 시대에는 몽고어를 쓰고 변발(□髮)에 호복(胡服)을 입지 않으면 행세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는 외가가 몽고황실인 공민왕에 의하여 고려문화의 복구로 판가름났다.

지금은 세계화를 안 하면 당장 나라가 결딴날 듯이 야단법석이고 영어를 못하면 후진국으로 전락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지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이것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강대국의 논리에 우리가 너무 동요하는 꼴밖에 안된다.

역사의 뒤안길에는 항상 이상론과 현실론이 공존하면서 상호보완을 해왔다. 이상론이 성하면 공허해지고 현실론이 성하면 초라해진다.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은 지금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세계화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19세기말 이후 우리에게 강요된 서구화의 본질과 현재의 경제논리로 재단되는 세계화의 본질을 깊이 있게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그렇게도 우수한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서구문화의 우월성이 무엇인지 점검할 필요도 있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개방과 자기보존의 문제에 대한 균형감각이며 세계화논리의 함정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다.

정옥자<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규장각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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