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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편파적 법집행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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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법전에는 없지만 실제로는 가장 엄하게 처벌돼온 범죄가 있다. '괘씸죄' 라는 죄목이다. 괘씸죄라는 이 신조어(新造語)야말로 현대 한국의 정쟁사(政爭史)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키워드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중앙일보 사태' 로 시작돼 '언론장악 문건' 파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최근 일련의 언론관련 사건들 역시 그 뿌리가 괘씸죄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괘씸죄를 묻는다' 는 뜻은 정치보복의 성격을 지닌 법집행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는데, 과연 괘씸죄 문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과정에서 풀어야 할 힘든 문제의 하나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보면 괘씸죄는 법전상의 죄목으로는 흔히 탈세.뇌물수수,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 범죄는 우리 사회가 좀더 깨끗하고 투명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척결돼야 할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괘씸죄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억울할 뿐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오랜 관행에 따른 것이고 자신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저질러온 것인데 왜 자신들의 행위만 문제삼느냐는 것이다.

이른바 '표적사정' 의 논리다. 반면 권력을 쥐고 죄를 묻는 쪽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오직 엄정한 법집행일 뿐이고 여기에 맞서는 것은 반(反)개혁세력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판단이 헷갈리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체로는 괘씸죄 문책의 부정적 측면, 즉 그 편파성보다 긍정적 측면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반응을 보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형평성 시비가 있더라도 이같은 시민들의 반응을 좇아 편파적 법집행이 지속돼도 무방한 것인가.

올 봄, 세칭 '세풍(稅風)' 사건을 비롯해 정치인 사정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사정 대상으로 지목된 정치인들 중에는 집권당 소속 의원들도 있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훨씬 많았는데 야당이 이를 편파사정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은 물론이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해 필자는 한 신문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실로 입증된 이상 한 정권 아래에서 정치인 사정이 편파적으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정권에서 또다시 이전 정권을 겨냥한 사정이 반복될 것이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나름대로 사정의 형평성이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

최근의 정치상황을 보면서 필자는 이 말을 유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필자의 언급에서 전제돼 있는 것은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실로 입증' 됐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점과 관련해 생겨나고 있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현실화된 만큼 집권자는 도리어 집권연장에 더욱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혁을 앞세운 사정의 편파성이 심하면 심할수록 집권연장에의 집착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문제는 집권연장을 위한 정략이 대개의 경우 국가이익과 상치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최근 집권당이 천명한 정치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나 있다. 내각제 개헌 문제에 대해 공동여당은 '연내개헌 유보' 라는 모호한 입장을 취해왔는데, 얼마전 집권당은 정부형태에 관한 당의 방침을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겠다는 의도를 드러내 보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여러 논자들이 의혹을 제기해온 임기말 내각제개헌설을 확인해주는 것이고, 집권연장을 위한 정략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과연 통일이 될 때까지 유지할 바람직한 정부형태가 의원내각제라고 판단한 것인가.

국회의원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집권당의 계획 역시 권력연장의 방편이 아니냐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중선거구제론의 가장 큰 명분은 지역정당체제를 완화시킨다는 것인데, 그러나 공동여당의 중선거구제론이 특정지역끼리의 지역연합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 제도는 도리어 지역대립구도를 온존시키는 제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국가의 기본틀이 되는 정부형태와 선거제도를 권력연장을 위한 정략차원에서 다룬다면 '새 천년' 을 말하는 것조차 쑥스러워진다.

결국 법집행의 형평성이 중요함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형평성 없는 사정과 개혁에는 너무 큰 대가(代價)가 따른다.

양건 <한양대 법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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