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CH 대학원, 국적 안 따지고 ‘철강 석학’ 영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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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미국·스웨덴·영국·벨기에…, 석학들이 있는 곳이라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철강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철강연구소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지만 석학 초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POSTECH이라는 이름이 외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데다 한국까지 가서 연구를 한다는 것 때문에 석학들이 쉽게 선택을 하지 못했다. 이 원장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철강기업인 포스코와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숱하게 대륙을 넘나든 끝에 이 원장은 전임교수 13명 중 4명을 해외 초특급 석학으로 채우는 데 성공했다. 부르노 디 쿠먼(52·벨기에), 프레데릭 발라(52·프랑스), 사사키 야스시(60·일본), 해리 바데샤(52·영국) 교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경쟁 철강업체에서 호시탐탐 스카우트하려 노리던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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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교수는 “일본을 비롯한 주요 철강 강국에서도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대단한 프로젝트”라며 “전 세계 철강업계는 물론 특히 일본·중국 철강업계와 학계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디 쿠먼 교수는 자동차 소재 분야에선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그는 POSTECH에 영입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 철강업체인 아르셀로미탈에서 자동차 강재 분야 프로젝트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디 쿠먼 교수를 빼기지 않으려는 아르셀로미탈의 견제 때문에 영입이 무산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POSTECH의 방대한 연구지원 계획에 결국 POSTECH이 내민 손을 잡았다. 발라(금속성형) 교수는 금속재료공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인터내셔널 저널 오프 플라스티서티’에서 지난 25년간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상위 10편 중 3편을 썼다. 사사키 교수는 최근 부상하고 있는 환경야금학(철강제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연구)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바데샤 교수는 철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베세머 금상’ 수상자다. 그의 특기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합금 개발이다.

이들이 영입되자 POSTECH의 연구열기는 한층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김낙준 POSTECH 철강대학원 교수는 디 쿠먼, 바데샤 교수에게 자문해 석유와 천연가스 송유관을 만드는 강재를 개발하고 있다. 구양모 교수도 디 쿠먼, 발라, 바데샤 교수와 함께 정부가 추진하는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공동연구사업을 유치했다. 구 교수는 모터 등 전기기구에 들어가는 전기강판을 개발 중이다.

김규영 POSTECH 철강대학원 교수는 “평소엔 만나기도 힘든 석학들이 모여 있는 덕분에 철강 관련 최신 정보들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시간으로 입수된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그들로 인해 POSTECH은 월드클래스의 학술 네트워킹을 갖췄다”고 덧붙였다.

◆석학 모셔 학교 세계화=POSTECH은 철강대학원에서 연구 중인 11개 분야 가운데 7개 분야는 내년께 세계 선두권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발라 교수는 “유럽과 북미 지역에 POSTECH과 POSTECH의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 세계적인 학술대회를 내년에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최근 들어 유럽과 일본 대학에서 교환교수 제안이 잇따르고, 인턴으로라도 대학원에서 경험을 쌓고 싶다는 문의도 많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인 엑손모빌은 올 3월 POSTECH과 협약을 하고 향후 10년간 철강·비철금속 소재와 석유·에너지 분야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인도·중국·이란·베트남·우크라이나 같은 개발도상국에선 자국 내 최고 인재를 뽑아 POSTECH 철강대학원에 보내고 있다. 현재 이들 국가에서만 20여 명이 유학을 와 있다.

국내 학계에 최근 들어 외국인 학자들의 포진이 두드러진다. 중앙일보 대학평가 상위 20개 대학의 경우 2002년 외국인 전임교수는 285명에 불과했다. 올해는 1418명으로 다섯 배가량 늘었다. 하지만 수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국제화를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바데샤 교수는 “물건을 사거나 병원에 가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생활을 꾸리기가 쉽지 않다”며 “이는 다민족·복수언어 문화가 일반적인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외국인으로 활동하기에 한계가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발라 교수는 “전자제품에 영어설명서가 없고 외국인 학교가 부족해 자녀가 있는 학자들은 한국에 오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디 쿠먼 교수는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 만큼 거꾸로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이 없는 건 아쉽다”며 “진정한 국제화는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외국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는 “해외 석학과의 학문 교류는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고 유학의 활로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상대적으로 부실한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교류도 내실을 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안혜리·이종찬·최선욱·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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