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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나의 송사] 1. 실패한 종교 - 정진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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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성급한 서기 2000년의 캘린더가 나돌고 있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갈데까지 간 9자들이 십진법을 꽉 채우며 넘어가는 시점. '큰 결산' 을 하고 '큰 출발' 을 준비해야 한다며 우리를 몰아온 지난 1년. 우리는 분주하게 반성하고 전망해왔다.

하지만 마음은 어딘가 허전하고 급하다. 20세기는 엄밀히 2000년까지이나 우리는 벌써 21세기를 맞고 있다. 금세기의 끄트머리에서 저명 문화.예술인들이 알뜰히 마련한 '20세기 송사(送辭)' 를 주제별로 내보낸다.

지난 1백년간의 문화.예술의 흐름을 짚어 우리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고 다음 세기를 예감하려 한다. 각 분야 권위자들이 남다른 혜안으로 써내려갈 이 '송별사' 가 세기말의 허전함을 달래고 새 세기를 맞을 사색의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보냄의 이야기는 무릇 아쉬움의 정서로 적셔져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사물의 사라짐을 말하는 것은 그것과 더불어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일 터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설혹 온통 부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러함에 대한 한스러움까지 포함하는 아쉬운 아픔을 겪는 것이 그 보냄의 진정한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위한 송사(送辭)도 다르지 않을 듯 하다. 때로 역사를 말하고 문화를 말할 때면 그것은 자디잔 개인의 실존과 다른 크나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주체되어 느끼는 감성적 지각과 단절된 역사나 문화는 다만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때로 경험적 현실을 마구 짓밟는다. 따라서 그렇게 직접적인 감성의 자리에서 이제 막 사라지는 20세기의 종교를 바라보노라면 종교가 참 딱하고 안됐다는 느낌이 든다.

근대 이전만 해도 종교는 스스로 물음에 대한 해답임을 의연하게 주장하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였다. 사람들은, 공동체나 문화나 역사는, 종교를 간과할 수 없었다. 종교는 의미의 원천이었고 또한 지향하는 종국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생각해보자.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절대적인 권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종교는 어떻게 있었는가□ 다만 거세당한 황소처럼 맹목적인 저주를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도 종교는 '자기 편' 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을 뿐 현실적으로 그 사태에 대하여 질책도 하지 못했고, 스스로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도 그랬다.

종교는 오히려 혁명을 불가피하게 한 원인을 제공하는 주체로 간주되었다. 과학의 발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월이 난자당하고 신비가 치밀하게 해체되는데도 종교는 자기 언어의 진리성만을 주장할 뿐 그 언어의 적합성이 회의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오히려 궁극적인 의미나 실재를 지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히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여긴 이른바 '세속적인 가치' 들이 스스로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삶은 종교와 무관해도 의미 있는 보람을 빚어낼 수 있다고 발언할 때조차 종교는 이에 대한 적절한 응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길길이 뛰는 저주만으로 사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만약 그러한 현상을 '새로운 종교의 출현' 이라고 한다면 20세기는 종교적이지 않은 것의 종교화 현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세기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의 실종이나 몰락을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종교의 몰락과 종교의 확산' 이라는 역설 속에서 쇠잔해 가는 종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권의 거의 완벽한 소통을 경험한 20세기는 특정 종교의 자기 주장의 논리가 인류의 종교경험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절대 종교의 부재로부터 비롯하는 종교다원현상이 종교들의 기존의 선언들을 한갓 독선적인 배타적 언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현실에 대한 종교의 인식은 전통과 정통, 진리와 절대의 개념들에 의하여 차단되고 있다.

그리하여 20세기 종교의 생리는 피해의식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공격적 배타성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에 이르고 있는데도 이러한 상황을 종교는 '진리를 위한 순교적 정황' 으로 묘사하는데 바쁘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전쟁들은 거의 '종교전쟁' 의 범주 밖으로 나가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저주, 자비라는 이름의 경멸이 현실화된 종교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롭고 가슴 아픈 일이다.

20세기의 종교가 이렇게 된 까닭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가치나 의미의 중심이 변화하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 바뀜' 의 추세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의 종교다움의 상실이 빚은 종교 자체의 비극일 수도 있으며, 종교의 필요 자체가 소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이 가닿는 경험을 준거로 한다면 무엇보다도 종교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종교의 필요, 또는 종교적인 물음이 소진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20세기는 그 무력한 종교를 안고 사라져가고 있다. 만약 종교가 좀더 자신을 열어 놓았더라면 하는 아픈 아쉬움을 간직한 채 우리는 그 종교를 세월에 실어 보내야 한다.

만약 종교가 조금만 더 자신에게 정직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도 이제는 메아리 없는 절규일 뿐이다. 제도적 권위의 늪에서 허위적거리지만 않았어도, 경전의 문자에 매여 독선을 절대화하지만 않았더라도, 종교가 삶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삶이 종교를 요청했던 것이라는 사실에 좀 더 겸허했더라도, 값싼 해답을 흩뿌리고 편리한 환상을 양산하지만 않았더라도 하는 아쉬움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뿐, 이제 그 종교의 세기는 사라지고 있다. 그렇지만 바야흐로 20세기의 처음보다 그 마지막에 이르면서 삶의 문제는 더 절박해지고 있다. 기존의 인식 기반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 이제까지의 규범적 준거에 대한 근원적인 되물음의 절규는 가장 전형적인 종교적 물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을 전유한 특정한 문화도 없고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전유한 특정한 문화도 없다. 삶은 제각기, 그러나 모두, 종교적이다.

그리하여 종교에 대한 종교다움을 묻는 물음조차 종교적으로 발언되고 있다. 이것이 20세기를 마감하면서 21세기를 지향하는 문턱에서의 종교의 실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0세기 종교를 위한 송사를 어떻게 마감해야 할 것인가□ 이 아프고 저린 별리에서 우리는 아직도 종교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세기를 위한 종교적 상상력의 펼침을 어떻게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기억을 지닌다. 사라진 20세기의 종교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그 종교가 발언했던 여운을 잊지 못한다.

아마 그것은 20세기 이전의 세기에서도, 또 그 이전의 세기에서도 그렇게 여운으로 전승된 어떤 실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실체이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어도 좋다.

'모든 것의 버림이 얻는 완전' '죽음이 낳는 새로운 삶' 등이 바로 그 기억의 내용인데, 우리는 그 기억을 지니고 새 세기를 이제 열어야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20세기의 종교에 대한 고마움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이 아픈 아쉬움을 스스로 달래는 우리의 송사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진홍 <서울대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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