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기를 넘어] 10. 게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엮는 '세기를 넘어' 시리즈의 열번째 주제는 '게릴라' 다. 이는 20세기 들어 민족해방운동과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지배적 정치구도에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투쟁방식이었다.

인도차이나.동구.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다수 국가가 게릴라 조직에 의해 정권이 수립됐으며 지금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NL), 콜롬비아의 혁명군(FARC), 페루의 '빛나는 길' 의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였던 체 게바라에 대한 추모열기가 90년대 후반 들어 중남미에서 유럽까지 확산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왜 서구인들에게 문화적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게 됐을까. 21세기를 앞둔 지금 이를 짚어보기 위해 게바라의 근거지였던 쿠바를 찾았다.

멕시코의 칸쿤 공항에서 1인당 15달러를 주고 쿠바행 비자를 받은 취재진은 아바나행 DC-9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쪽빛 파도가 일렁이는 카리브해 저편에 쿠바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자 순간 취재진의 뇌리에는 풍성한 구렛나루의 피델 카스트로와 시거, 사탕수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등의 단상(斷想)이 오버랩됐다.

쿠바의 관문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하자 청사 로비에 걸려 있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미소띤 초상화가 이방인들을 반겼다.

카스트로가 아닌 게바라라니, 뜻밖이었다. 취재진이 묵었던 아바나시 외곽의 호텔에서도 게바라의 사진집, 그가 썼던 것과 같은 모자, 그에 관한 서적들이 로비 한쪽을 빼곡이 메우고 있었다.

아바나 시내에도 게바라 기념품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카스트로의 동지이자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였던 그의 다양한 표정이 담긴 티셔츠나 맥주컵, 추모 음반과 관련 서적들, 사진집, CD롬, 베레모, 우표, 배지 등등.

길거리에서 마주친 한 노동자는 게바라의 얼굴이 문신으로 새겨진 구릿빛 등판을 자랑스레 보여주기까지 했다.

내무부 청사의 벽면에서도 게바라의 거대한 얼굴이 바로 아래의 혁명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외관만으로 쿠바는 카스트로가 아니라 게바라의 나라였다. 아니, 게바라의 기념관이었다.

취재진의 안내를 맡은 호세 마리오사 페레스 쿠바 대양주연구소 부소장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대개 게바라 열풍에 놀라게 된다" 면서 "아마도 그가 없었다면 쿠바의 관광수입이 많이 줄었을지도 모른다" 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게바라는 단순한 관광자원만은 아니었다. 도시건 산골마을이건, 사무실에도 가정집에도 게바라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쿠바인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수호신인 듯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게바라가 쿠바에서 이런 범국민적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 아바나대 캠퍼스에서 만난 여대생 야니 페레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권력에 눈먼 혁명가가 아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항상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혁명에 나섰고 목숨을 바쳤다. 게다가 그는 대단한 미남이다. " 그래서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게바라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 이라고 했다.

미국의 전기작가 존 리 앤더슨은 '체 게바라. 그 혁명적 삶' 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취재하면서 전세계 게릴라 운동에 미친 게바라의 영향이 일반의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80년대 중반에 엘살바도르.콜롬비아.미얀마.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만난 여러 종류의 게릴라 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게바라를 존경하며 그가 걸었던 길을 따르고 싶다" 고 했다는 것이다.

게바라 열풍이 보여주는 '게릴라 컬트' 는 라틴 아메리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60~70년대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 역시 이들에게서 실존적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히피와 록음악 등 청년문화는 체제에 대한 무장투쟁에서 '문화투쟁' 의 새로운 방식과 '저항의 낭만' 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까지 강도를 달리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가 73년 한때나마 페론에게 정권을 넘겨줘야 했던 과정에서도 땅속의 게바라가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당시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학가는 볼리비아에서 눈을 반쯤 뜬 채 숨진 게바라의 시신 사진으로 뒤덮였다는 것이다.

쿠바에서 게바라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6월, 그의 유골이 발굴되면서부터다. 그는 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전투 중 붙잡혀 그 다음날 다리와 폐에 기관단총을 난사당해 39세의 생을 마감했다.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쿠바에 게바라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그의 두 손목을 잘라 보냈다. 시신은 남몰래 버려졌기 때문에 30여년간 전설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푸른 올리브색의 군복 조각 사이에 두 손목이 잘려진 유골이 동료들로 보이는 6구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면서 게바라의 신화, 게릴라의 신화는 부활했다. 마치 게바라가 임종 직전 남긴 "나의 실패가 결코 혁명의 종말은 아니다" 는 예언을 실현하듯이.

게바라가 처형됐던 볼리비아의 바예그란데 지역은 요즘 '성지' 가 됐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순례자' 들은 게바라가 66년 12월 볼리비아에 도착해 67년 10월 최후를 맞을 때까지 이동했던 '게바라 루트' 를 따라 행군한 후 그가 사살된 이게라에서 추모집회를 연다.

게바라 바람은 멕시코에도 불고 있다. 주목받는 게릴라 단체의 지도자가 여러가지 면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농민 반군인 EZNL의 지도자 마르코스(41). 지난 94년 1월 멕시코 북부 치아파스 원주민의 봉기를 주도한 마르코스는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공부한 인텔리겐치아 혁명가다.

니카라과 혁명에도 참여했던 그는 스키 마스크를 자주 착용하고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우며 마야신들에 대한 '색깔 이야기' 라는 동화책을 집필할 만큼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역시 글쓰기에 출중했던 게바라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게바라 추모열기에는 아이러니가 따른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다수 좌파 게릴라 단체들은 더 이상 무장투쟁에 의한 혁명을 꿈꾸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20년 전통의 게릴라 조직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의 지도자 오스카 라미레스 두란(46)이 지난 7월 14일 중부 안데스산맥의 정글에서 체포된 후 게릴라활동은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아바나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는 오마르 비야누에바 박사는 "중남미의 대다수 게릴라들은 이제 밀림생활을 청산하고 제도권 정치세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면서 이는 "무장투쟁이 대중적인 지지를 잃었기 때문" 이라고 풀이했다. 피델 카스트로조차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장투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 했을 정도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는 전향한 게릴라세력이 이미 연립정부에 참여했으며, 엘살바도르에서도 여러명이 지방정부를 이끄는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우루과이에선 게릴라 출신 국회의원이 한때 총부리를 겨눴던 군부와 의회에서 마주앉아 국방예산안을 놓고 격렬한 입싸움을 벌이고 있다.

1999년의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 투쟁은 시대의 조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수탈과 압제로부터의 해방' 은 아직 '미완의 과제' 로 남아 있다.

쿠바 아바나.산타클라라〓강문구(경남대.정치학), 유권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