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화재참사] 불길에 사라진 인천여상 9명 '소녀의 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친구 생일파티에 잠깐 다녀오겠다더니, 왜 말도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났니. " 31일 인천시 계양구 서운동 S장례식장. 인현동 4층상가 화재로 숨진 한아름(18.인천여상3)양의 빈소에서 어머니 이영래(41)씨는 딸의 사진을 품에 안고 하루종일 한없이 울었다.

아름양은 몇년전 부모가 운영하던 의류회사가 어려워지자 빨리 돈을 벌어 집안을 돕겠다며 일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

"3년간 줄곧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앞으로 2년 동안 돈을 벌어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었는데…. " 아름양은 2일 SK증권 신입사원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우수학생 학교장 추천으로 이미 신협중앙회.한국개발연구원(KDI)에도 합격했다.

"아름이는 평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성장한 탓인지 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부모의 가슴에 묻힌 아름양은 이날, 한달전 아남반도체에 취직한 친구 미선(18.사망)양의 생일파티에 참석중이었다.

집안일 때문에 생일파티에 가지못한 張모(18)양은 "친구들 대부분이 학교성적이 좋아 이미 취직을 했기 때문에 술을 마셔도 될 것 같아 그곳에서 모임을 가진 것인데…" 라며 친구 9명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름양과 함께 변을 당한 김은영(金恩英.17)양의 아버지 김종선(金鐘善.48)씨도 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듯 연신 눈시울을 적셨다.

"올초 내가 용인대 3학년에 편입하자 '언니도 대학에 다니는데 학비 부담이 너무 크니까 아빠가 졸업하면 대학에 가겠다' 며 애비를 울렸는데…. "

반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괜찮았던 은영양은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 잠시 꿈을 접어 두기로 하고 대신 직장생활로 학비를 벌겠다며 취업 준비에 전념해 왔다. 정보처리.워드프로세서 등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들도 취득했다.

친구 두명의 생일 선물로 예쁜 상자에 담긴 반지를 사 어머니에게 보여주며 기뻐하던 은영양은 30일 오후 4시쯤 집에서 나간 뒤 언니와 핸드폰으로 연락한 게 마지막 대화였다. 생일파티의 주인공이었던 황미선(18)양의 가족들도 뜻밖의 참사에 넋을 잃었다.

미선양은 지난 7월 중순부터 인천시 효성동 아남반도체에 취업, 출근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박옥화(70)씨는 "부모가 직장 일로 김포에 거주하고 있지만 미선이는 나와 살면서 늘 표정이 밝았다" 고 말했다.

이번 화재로 사망 9명, 중상 1명이라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인천여상은 모범생들이 변을 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특히 5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태인 3학년 2반 담임 권경순(權敬純)교사는 "곧 취직해 사회로 진출하려던 애들에게 하루 아침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며 허탈해 했다.

이무영.배익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