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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기왕위전] 유창혁-이창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잘 버티던 유창혁, 중앙소 급소 찔리는데…

제5보 (98~125)〓날은 저물 었는데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어둠 속을 응시하는 劉9단의 시선엔 초조함이 담겨 있다. 판위의 흑돌들은 마치 李왕위의 충성스런 근위병들처럼 눈을 빛내며 사방을 감시하고 있다.

이 철벽수비를 뚫고 집을 훔쳐낸다는 것은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劉9단은 98 먹여치고 100으로 몰았다. 마음은 급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교훈을 따르며 조용히 힘을 비축했다. 이런 점이 劉9단의 무서운 점이다.

상대는 물론 잇지 못한다. 만약 이었다가는 흑 '가' 의 맥점으로 전체가 사망한다. 백△와 흑▲를 미리 교환해둔 효과인데 이제 흑 2점을 빵빵 때려내는 것이 모두 선수가 됐다. 집으로는 불과 4집이지만 그 두터움은 쇠심줄이라도 녹여버릴 만하다.

劉9단은 이렇게 힘을 응축시키며 '한 수' 를 보고 있다. 바로 '나' 의 끼움수. 보통은 황당무계한 수지만 지금은 당하는 쪽에선 으악 소리가 날만큼 짜릿한 노림수다. 101에서 李왕위의 물샐틈없는 수비망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나' 의 끼움수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상대의 철벽을 의식해 본능적으로 지켜야한다고 느낀 것이다. 117까지 진행됐을 때 김승준6단.양건4단 등 젊은 기사들에게 "백이 불리하지?" 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대답이 영 뜻밖이다.

"팽팽한 승부로 보인다" 고 그들이 입을 모은 것이다. 이건 또 무슨 괴변이란 말인가. 그들은 "흑이 잘 두었지만 백에도 실수나 완착이 보이지 않는다" 고 했다. 118이 놓였을 때 양건4단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그는 백 '다' 로 중앙을 차지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는데 사태는 다르게 흘러갔다. 劉9단은 118에 두어 124까지 후수를 잡았고 결국 125의 급소를 얻어맞고 만 것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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