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동구] 12. 성공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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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모두가 우왕좌왕할 때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 모든 걸 걸고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중심가의 도로반칠로 거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8월 말 만난 아나그룹의 조르주 코포스(46)회장은 자신에 차있었다.

아나 그룹은 전자.통신.기계.출판.여행.호텔.제과 등 7개 기업에 프로축구팀까지 소유한 루마니아 재계 서열 4위. 90년 5백달러로 제과점을 낸 지 9년만에 일궈낸 성과다.

코포스 회장은 "젊어서 여행사 직원으로 일하며 남보다 일찍 자본주의 세계의 역동성과 프로 근성을 체험한 것" 을 성공 비결로 꼽았다.

제품 고급화를 통한 차별화나 축구광인 루마니아인을 노린 컬러TV 수입 등 시의적절한 전략구사와 하루 20시간씩 일하는 근면성도 모두 해외여행을 통해 다진 자본주의 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나 그룹이 자생적인 성공기업이라면 동구 최대의 자동차 업체 스코다는 밖으로부터 개혁된 대표기업이다.

스코다의 공장이 위치한 체코의 믈라다 볼레스바는 '스코다의 도시' 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 넓이의 공장을 비롯, 연구소.본부건물 등이 각각 따로 있을 뿐 아니라 병원.체육관에도 모두 스코다 마크가 붙어 있다.

심지어 거리에 나붙은 문화 이벤트 주관사도 모두 스코다다. 한참을 헤맨 끝에 찾은 본부건물에서 만난 루드비크 칼마 회장은 "과거 국가가 해주던 일을 이제 기업이 맡고 있다" 고 자랑했다.

스코다가 한 도시 전체의 생계와 복지를 책임질 만큼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얘기다. 스코다는 체코 자동차 시장의 75%를 점유하고 있으며 폴란드.헝가리 등에서도 40~5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스코다의 도약은 지난 91년 독일의 폴크스바겐이 지분 70%를 매입, 최대 주주가 되면서 시작됐다. 폴크스바겐은 2백여명의 전문 경영인 및 기술진을 투입, 스코다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소비자 중심의 저비용 생산' 이 모토였다. 대신 폴크스바겐은 1895년 설립된 스코다의 전통을 존중, 마찰을 최소화했다. 현재 5명의 최고경영진 중 3명은 독일인이며 2명은 체코인이다. 이들은 매달 한번씩 정기회의를 통해 양측의 불만사항을 해소한다.

폴크스바겐이 유럽연합(EU)에 속한 독일 기업이다 보니 모든 회계와 경영은 EU기준에 맞추고 있다. 전통적인 동구 기업과는 다른 투명한 경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바탕으로 91년 18만대에 불과했던 스코다의 생산능력은 올해 40만대를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64개국에 36만대를 수출했다.

양뿐 아니라 질도 개선됐다. 91년 4.8이던 불량지수(1점 만점)는 올해 1.3까지 내려갔다. 파급효과도 크다. 부품업체에 대한 엄격한 품질관리 결과 불량률 10% 이하의 상급 공급자 비율이 전체 공급자의 71%를 차지하고 있다.

91년에는 겨우 1%에 불과했다. 항공기 엔진업체인 'BMW-롤스로이스' 의 옛 동독지역 공장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의 생산성은 서독지역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대우가 폴란드 국영자동차회사를 인수, 설립한 대우-FSO는 폴란드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 투자사례로 꼽힌다.

교육을 통한 직원의식개혁운동을 펼쳐 새로운 경제체제에 대한 직원들의 적응력을 높인 것이 주효했다고 현지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듯 동구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분야도 정보통신업체다.

동구에서 보기드문 뉴욕 증시 상장기업인 마타브의 지난해 매출액과 이익은 각각 25.2%, 61.9%나 증가했다.

마케팅 담당 이사인 오토 게서는 "7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헝가리는 동구의 통신 중심지가 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힘이 아닌 아메리테크.도이체텔레콤 등 유수의 외국 통신사들과의 제휴를 통해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는 유럽 통신시장 개방에 따른 대처방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그들과 경쟁할 능력도 생각도 없다" 고 잘라 말했다.

세계 시장에서 국적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헝가리땅 안에 있으면 헝가리 기업" 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지필름 등 외국계 기업에서만 잔뼈가 굵은 경영인이다. 탄탄한 세계화 마인드로 무장된 것이다.

내년 '체코 텔레콤' 으로 재탄생할 체코의 통신업체 SPT도 사정은 비슷했다. 다나 드보라코바 대외담당 국장은 "체코 텔레콤으로의 변신은 기술중심에서 고객중심으로 변화를 위한 변신" 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신세대들의 저적인 투지가 SPT를 이끄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급성장 중인 동구의 통신업체들은 향후 동구의 발전과정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과거 산업화시대 한국이 고속성장을 이뤄낸 것처럼 정보화 시대의 계단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다. 이들 나라에는 호출기 문화가 없다. 유선에서 바로 무선통신으로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체코의 경우 유선 가입자수의 증가는 완만한 반면, 94년 5천명에도 못미치던 무선통신 사용자수가 올해 1백40만명을 넘어섰다. 늦은 출발을 일시에 만회할 고속성장의 엔진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체코의 파벨 메트리크 경제부총리는 "과감한 개혁을 도입한 몇몇 선도기업들의 눈부신 성장은 낙후된 동구 경제의 내일을 기약하는 큰 희망" 이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김석환.배명복 특파원, 채인택.최준호.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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