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FTA 가서명] 선박·차는 ‘수출 고속도로’ … 기계·화학은 타격 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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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가서명됨에 따라 18조4000억 달러(2008년 EU 회원국 국내총생산)에 달하는 세계 최대 시장과의 ‘FTA 동맹’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EU의 무역 빗장이 활짝 풀리는 동시에 국내 시장도 EU 측에 열린다.

한·EU FTA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와 국가전략에서 갖는 의미는 한·미 FTA 못지않다. 특히 한국의 산업 지도를 바꿔놓을 것으로 보인다. 선박·자동차·가전 등 EU에 대한 주력 수출업종은 더욱 활기를 띨 전망이다. 예컨대 현재 EU로 수출할 때 10%의 관세를 물어온 국내 자동차 산업은 호기를 맞게 되는 셈이다.

반면 EU가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계·정밀화학 분야에선 EU 제품의 수입이 늘어나 일본·미국산 제품을 대체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따른 부수적 효과도 만만찮다. 멈춰서 있는 미국 내 한·미 FTA 비준을 자극할 수 있다. 일본이 한·일 FTA 체결을 위해 한국에 대한 기술 제공과 투자 확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촉매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정작 한·EU FTA의 국내 비준 열쇠는 농산물 등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가 쥐고 있다. 정부는 농축수산업 보호를 위해 협정문에 다양한 조치를 담았다고 설명한다. 냉장삼겹살·사과·쇠고기·인삼 등 9개 품목에는 수입이 급증할 경우 높은 관세를 물릴 수 있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설정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분석에 따르면 한·EU FTA로 인한 앞으로 15년간의 국내 농어업 분야 피해액(생산 감소액)은 최대 2조80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정부는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 중이다. 수입 증가로 피해를 보는 농어가에는 피해보전직불금이나 폐업지원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이미 2008~2017년 21조1000억원 규모의 농축수산업 지원 계획이 마련돼 있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우 무역조정지원제도를 통해 피해 기업에 대한 융자와 컨설팅을 지원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한·EU FTA에 대한 최종적인 국내 대책은 내년 1분기 적절한 시점에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EU FTA 협상에 대해 무난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역진방지장치나 투자자 국가제소조항 같은 이른바 ‘독소 조항’들도 포함되지 않았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글로벌연구실장은 “관세 장벽이 크게 낮아져 한국의 주력 수출업종이 수혜를 받게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는 EU의 이득도 클 것”이라고 말했다.

아쉬움은 있다. 개성공단 문제를 깔끔하게 규정하지 못한 것이나 관세환급을 추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다. 또 교육과 의료 분야는 한·미 FTA 때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개방하지 못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신성장 동력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교육·의료 분야가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더 전향적으로 개방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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