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석학칼럼] 선택은 北에 달려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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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이 미국과 미사일 실험의 동결에 동의한 것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의 활동이 가져온 최초의 반가운 성과다.

그러나 큰 성과라곤 할 수 없다. 어느 쪽에 의해서든 쉽게 깨질 수도 있다. 평양은 언제든지 또다른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미국 역시 완화했던 경제제재를 즉각 환원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는 하나의 반가운 방향 전환이다. 몇달 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간 군함 충돌이 있었다. 이 영향으로 경수로 개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지난 94년 여름 한반도에 발생했던 긴장상태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현재 북한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다. 비밀에 싸여 고립돼 있는 북한은 외부인들에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국가고 또 평양의 호전적인 외교스타일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왔다.

1백만명이 넘는 군대의 3분의2를 비무장지대로부터 1백㎞ 이내에 주둔시키고 있는 북한은 재래식 전쟁의 위협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영변의 핵시설 가동이 중단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를 감독하게 됐지만 북한이 언제든지 감독관을 쫓아내기만 하면 핵무기 6개 제조분량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위협은 1년 전의 대포동 미사일 실험이다. 당시 일본과 미국의 여론에 충격을 준 바 있다. 일부 관측자들은 실제 위협이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북한의 국력이 10년간의 경제침체와 최근의 기근사태로 매우 약해졌을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을 무모하게 공격할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악화가 북한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제네바 기본합의가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험 가능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불이 난 10층 건물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모든 출구는 다 봉쇄돼 있다. 만약 뛰어내린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은 5%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다면 1백% 죽게 돼 있다.

이 상황에서 비록 생존 가망성이 낮더라도 뛰어내리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다. 북한이 이러한 상황에 빠진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데 위험이 있다.

한국과 미국의 군대가 북한의 충동적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유지함과 동시에 북한이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길들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한국 속담에 "막다른 길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대든다" 는 게 있지 않은가. 페리 보고서의 제안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 및 일본 정부와의 긴밀한 논의를 거친 페리 보고서는 북한이 현재의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미국과 그 우방들에 북한 정권의 존재는 달갑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도록 처음으로 권한 이 보고서는 북한의 위협을 줄일 현실적 방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련 붕괴와 한.중간 국교수립 이래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탈출하려 애쓴 증거도 없지 않다. 북한이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합의가 필요하다.

과거 북한은 한.미간 유대관계의 약화를 합의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미국은 이를 거절해 왔다. 이제 미국은 새로운 대북정책을 세운 김대중(金大中)정부와의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할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페리 보고서는 북.미 관계의 미래에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협조의 길은 북한이 미사일 실험과 수출을 중단하고 IAEA의 감독 아래 핵계획을 동결시키는 것이다. 그 대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고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한다.

만약 이 길이 막힌다면 다른 길은 지역 군사력 증강으로 북한의 고립을 더욱 강화하는 방법이다. 페리는 지난 5월 북한 방문시 이 두가지 길을 명시했고, 9월이 돼 협조의 길을 향한 첫번째 잠정적 조치가 구체화돼 나온 것이다.

협상이 깨질 위험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의 주목을 끌기 위해 위협적 수단을 사용하는 소위 '강경 외교노선' 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북한은 행태를 바꾸는 대가로 어떻게든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기 쉽다.

즉 페리 보고서를 잘못 판단하고 미사일 수출 중단의 대가로 더 큰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페리 보고서는 그런 흥정의 여지에 명백한 선을 긋고 있다. 그런 흥정은 북한의 욕심만 더 키워줄 것이고 또 평양의 강경외교에 이미 반감을 갖고 있는 미국 의회에서 승인해 줄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유리한 협상고지를 점하기 위해 또다른 미사일 실험을 감행하려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 의회는 연료지원과 경수로 개발계획 지원을 중단하고 경제제재를 환원시키라고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일본 정부도 비슷한 대응을 취하기 쉽다. 그러면 북한은 제네바 기본합의 위반을 빌미로 IAEA 감독관들을 내쫓고 영변지역의 핵연료 재처리 작업을 재개하겠다고 우길 것이다.

북한이 단순히 협상수단의 하나로 이런 조치를 취하더라도 지난 94년 여름과 같이 유엔의 경제제재조치 요구와 이 지역 군사력 강화가 재연될 수 있다.

94년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페리는 한반도에 군사적 충돌의 실제 위험이 있었다고 증언해 왔다. 북한 스스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중국 정부가 북한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북한이 지나치게 뻣뻣하고 서투르게 협상을 진행시킨 나머지 페리 보고서의 협조의 길을 망쳐버리고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위기로 바꿔버린다면 비극적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다.

조지프 나이 <美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학장>

◇ 조지프 나이(61)

▶미 프린스턴대 최우수 졸업, 하버드 대 박사

▶국무부 차관보, 중앙정보국 국가정보위원장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정치대학원)학장. 국제문제 연구소장

▶저서 : '핵윤리' '국제분쟁 이해' '이끌 수밖에 없는 미국

정리〓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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