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선 피아니스트, 무대 밖에선 늑대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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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40)는 다소 차갑게 보이는 외모만큼 단단한 타건으로 유명하다. 라흐마니노프·그리그 협주곡, 브람스 독주곡 등으로 앨범을 내놨다. [크레디아 제공]

프랑스 태생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40)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91년 봄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의 탤러해시에서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던 밤이었어요.” 전화 인터뷰에 응한 그리모는 빠르고 활기찬 말투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제 개가 덤불 속으로 숨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덩치 큰 개처럼 보이는 동물 하나가 길가로 나왔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미국 뉴욕 필하모닉 등 세계 일류 음악가들과 함께 공연하던 피아니스트의 삶에 이때부터 늑대가 끼어들었다. “아마 늑대와 개의 중간쯤 되는 동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누군가 불법으로 집앞 마당에서 키우고 있었을 거에요.” 그의 팔을 핥은 늑대는 두려워하던 그리모의 품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새로운 생명력을 느꼈고, 그때부터 늑대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눈에 띄는 외모와 연주력으로 ‘피아노계의 안네 소피 무터’라고 불렸던 그리모는 1999년 늑대보호재단을 설립했다. 대학에서 동물학 공부도 시작했다. 재단은 17마리의 늑대를 보호하고 키우면서 번식시키고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했다. “그중 네마리에게는 ‘늑대 대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관람객들과 만날 수 있게 했어요.” 연주 횟수보다는 보호하는 늑대의 수를 늘리는데 관심을 쏟았다. 늑대의 생존과 생태계의 보존 등과 관련한 캠페인도 벌였다. 현재 그의 재단은 32마리의 늑대를 돌보고 있으며 한해 2만명의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로써 그는 ‘발언하는 연주자’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백혈병 재단에 750만 달러(약 87억원)를 쏟아부은 테너 호세 카레라스(63), 뉴욕 식물원 이사회와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후원회’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제시 노먼(64) 등이 무대 밖 활동에 푹 빠진 대표 음악가들이다.

그는 “연주자들이 연주만 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음악가는 인간의 모든 감정을 써야하기 때문에 사회 운동에 있어서도 힘이 세다”는 설명이다. 한해 140회에 이르던 연주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는 늑대도, 음반도 저의 ‘아기들’이라고 불러요. 한쪽의 아기들이 다 자라면 그제서야 다른 쪽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2월 13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열리는 공연은 그의 첫 내한이다. “그간 너무 바빠 한국을 한번도 찾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그는 바흐의 평균율, 리스트의 소나타 등 피아니스트의 ‘교과서’격인 프로그램을 골랐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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