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제3의 문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요즘 청소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나라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참 많다. 인터넷 댓글이나 채팅 등 온라인에서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통신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엔 이런 언어들이 인터넷을 뛰쳐나와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어 어지럽기까지 하다. 글자 모양은 한글인 것 같은데 뭔 말인지 그 뜻을 알 수 없으니 까막눈이 따로 없다. 인터넷을 아는 40~50대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대다수 노인에게 변용된 한글은 외계어와 다를 바가 없다. 신세대에겐 ‘언어 유희’일지 모르지만 노인 세대에게는 ‘언어 고문’인 셈이다. 글자 문맹, 인터넷 문맹에 이어 통신어 문맹 시대가 온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신세대의 조어(造語) 행위가 곱게 보일 리 없겠지만 그들 또한 신조어를 즐겨 썼던 시절이 있었다. ‘아더메치유(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고)’란 줄임말은 지금은 잊혀진 추억의 말이지만 20, 30년 전 당시엔 세대를 초월해 통용되던 유행어였다.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도 비슷한 사례다. 지금 청소년들 입장에서 보면 유치찬란하다 하겠지만 그땐 그랬다.

이에 비하면 요즘 청소년들이 만들어내는 신조어는 가히 창조에 가깝다. 모양도 기묘하고 조어 방식도 무궁무진해 원작자가 밝히기 전에는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신조어가 생산되는 주기도 빨라져서 자고 나면 국적 불명, 출처 불명, 작자 불명의 변형된 한글이 은행에서 카드 찍어내듯 쏟아져 나온다. 이런 추세라면 ‘한글 변용어 사전’이라도 편찬해야 할 판이다. 그중에는 강추, 얼짱, 방가방가, 썩소, 쌩얼 등 이미 일상어가 된 단어도 적지 않다.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뭔 걱정이 있을까. 여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한 ‘솔까말’ ‘근자감’ 등의 낱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줄임말이란다. 복잡한 것을 귀찮아하는 신세대의 특징이 반영된 때문인지 자음만으로 만든 ‘ㅎㅎ’ ‘ㅋㅋ’ 등도 그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언어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3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자는 아직도 새 글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지만 한글만큼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은 언어는 드물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로버트 램지 메릴랜드대 교수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다”고 칭송했을 정도다. 어쩌면 외계어 운운할 정도로 희한하게 생긴 조어가 탄생할 수 있는 것도 한글만이 가진 장점 때문에 가능할지 모른다.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천지인을 형상화해서 소리 나는 그대로 쓸 수 있는 과학적인 문자가 세상에 한글 말고 또 있는가.

신조어의 범람이 한글의 발전을 위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대비해야 할 일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아직 언어교육을 덜 받은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에게 국적 불명의 신조어가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말을 문자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며 수입해다 쓰는 문자 한글.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글을 기왕이면 소중히 갈고 닦아서 더 아름답게 빛내야 하지 않겠는가. 한글 변용과 오용이 너무 많아 부끄러워서 자조 삼아 하는 말이다. 한글의 위대함에 새삼 감사하면서.

박국양 가천의대길병원 흉부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