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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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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환율이 오르면 일반 소비자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 수출기업을 도와주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금리를 내리고 통화공급을 확대해 인플레가 유발되면 근로소득자와 예금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 부채가 많은 기업과 주택담보로 돈을 빌린 중산층 가계를 지원하고, 재정적자로 빚을 진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종합부동산세로 강남 주민들이 수백만원 혹은 기천만원의 세금을 더 내게 됐을 때 국가에 소송을 내고 정권퇴진 운동까지 벌였으나 환율이 대폭 올라 그들의 해외여행 경비, 자녀 유학비가 수백만원 혹은 수천만원 늘어났을 때는 조용했다. 만약 정부가 소비세를 징수해 수출대기업들에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으면 언론과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시장과 대중, 여론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만큼 국가는 스스로 정책의 정직성·공정성·건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정책은 대중을 호도하고 속이기 쉽다. 재정적자를 통해 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낮추면 당장 주머니에서 돈을 내게 되는 시민은 없다. 부담은 없으면서 일자리가 늘고 성장률이 올라가면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민은 각종 세금을 통해 혹은 인플레를 통해 이에 대한 청구서를 지불하게 된다. 혹은 자식들의 세대로 청구서를 넘기게 된다.

세계 금융위기를 맞아 경제학자들은 자성과 함께 새로운 인식을 찾아가고 있다. 과거 경제학이 기반하고 있었던 합리적 기대 가설, 시장효율성에 대한 가설들이 얼마나 책상 위의 가설에 불과했던 것인가에 대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경제와 금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무학이나 거시경제학과 같은 좁은 학문적 영역의 사고가 아닌 정치·사회·심리, 나아가 역사학적인 통찰이 필요하다는 인식들이 대두되고 있다. 18~19세기 경제학의 시조들이 철학·도덕·정치·인성의 바탕에서 경제를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정부와 이익집단 간의 담합에 의해 경제정책이 일반시민과 장래 납세자의 주머니를 담보로 해당 집단의 이익을 챙겨주게 되는 것을 설명하는 새로운 논문들은 특히 흥미롭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를 위해 좋은 것은 미국 경제와 미국을 위해 좋다는 등식을 당연시했다. 이의 뒤에는 월스트리트의 의회·정부·언론·학계에 대한 막강한 로비가 있었다. 감독과 규제는 완화되고 부채를 기반으로 한 대형화·겸업화·증권화는 촉진됐다. 미 연준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10대 미국은행의 시장 점유도는 1999년의 35.6%에서 2008년 53.9%로 늘어났다. 이들의 임직원 봉급은 같은 기간 중 308억 달러에서 749억 달러로 2.4배가 늘어났다. 반면 일반주주들에 대한 배당은 동 기간 중 순자산의 0.8%에서 0.3%로 줄어들었다. 임직원들은 주주 배당의 4.3배에 해당하는 소득을 가져갔으며, 은행이 위기를 맞았을 때 손실은 고스란히 일반주주들에게 돌아갔다.

위기 후 미국은 다시 엄청난 재정지출과 통화공급을 월스트리트에 쏟아 붓고 있다. 블룸버그의 추산에 따르면 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 인한 손실이 약 1500억 달러였던 데 반해 이로 인해 촉발된 금융위기에 미 정부와 중앙은행은 이의 약 100배인 13.2조 달러를 금융가에 쏟아 붓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단 위기는 진화됐으나 앞으로 이 엄청난 비용이 누구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게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다시 순진한 대중의 부담으로 전가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국제공조로 이뤄진 엄청난 재정·통화 팽창을 통한 이번 세계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은 향후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심대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를 비롯해 이들 나라의 정치와 정부 정책의 공정성·정당성은 앞으로 얼마나 적시에 출구전략을 구사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의 비용을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지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보호해 주며 장기적으로는 무력한 일반 시민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 당장 일자리를 늘리고 성장률을 높였다는 이유로 업적과 성취로 부각될 것인가? 당장 몇 년의 성장률을 높이는 반면 경제 곳곳에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구조적 취약성을 키우는 것이 여론에 의해 박수로 수용된다면 미래와 차세대를 걱정하며 신중한 정책을 채택하는 정부는 앞으로 다시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실패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