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녹인 백건우의 열손가락-서울국제음악제 개막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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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신작 (新作) 은 연주자를 잘 만나야 한다. 훌륭한 연주자는 평범한 작품까지 걸작 (傑作) 으로 들리게 하는 마력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사의 위대한 작품들은 명연주자와의 협력을 통해 탄생되는 경우가 많다.

99서울국제음악제의 오프닝 무대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 (지휘 부르노 페랑디스) 이 국내 초연한 강석희의 '피아노 협주곡' 은 라디오 프랑스 주최 프레장스 페스티벌이 위촉.초연한 작품. 이날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상투적인 불협화음마저 크리스탈처럼 영롱한 '화음' 으로 풀어냈다.

이날 청중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용트림하는 관현악의 포효가 아니라 대편성 관현악마저 압도할 정도로 파워와 개성있는 빛깔의 음색을 소유한 백건우의 열 손가락이었다. 날카로운 현대적 감각을 낭만적 서정으로 채색한 건반 음색의 배합이었다.

지난해 파리 초연을 이끌었던 부르노 페랑디스 - 백건우 콤비는 초연 실황앨범에서 보여줬던 '어색한 만남' 을 훌훌 털어내고 마치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의 협주곡을 연주하듯 자연스럽게 악보의 행간 (行間) 을 읽어나갔다.

강석희의 '피아노협주곡' 은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페스티벌에서 위촉한 '달하' 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한국적 음색의 모델이 궁중아악 (수제천)에서 민속악 (사물놀이) 으로 옮겨진 것. 국악에서 비롯된 선율.리듬이 서양 오케스트라의 문맥에 자연스럽게 용해된 것도 달라진 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피아노협주곡' 은 20, 30년전 유행하던 무조음악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피아노 독주 부분이나 상투적인 끝마무리는 다차원적으로 전개되는 작품 전체의 구도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에너지의 흐름도 몇개의 악기군이 빚어내는 단순 명료한 사운드로도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음의 경제학' 이 아쉬웠다. 음악적 에너지보다는 제스처로 충만된 작품이었다.

서울시향이 이날 함께 들려준 미요의 '지붕 위의 소' 는 남미의 토속적 리듬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첼로의 곡중 독주 부분은 악장.수석주자의 연주 기량을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창작음악에 대한 배려' 가 외국의 방송사가 위촉.초연한 작품을 재공연하는 정도에 그쳤다는데 있다.

이번 음악제에서 윤이상을 비롯, 한국작곡가 5명의 작품을 연주했지만 그중 신작 초연은 단 한편도 없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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