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여의도광장, 광화문광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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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02면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은 근사했다. 광화문광장은 짜임새를 더했다.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넣어줄 만하다. 국민이 권력과 이웃하는 느낌을 준다. 기념촬영 명소가 됐다. 광장 조성에 450억원가량의 엄청난 세금이 들어갔다. 아쉽고 허전한 점도 많다. 기본적으로 작다. 도로 가운데 고립돼 있다. 번잡함과 매연 탓에 오래 머물기 힘들다. 광장이기보다 전시장 같다.

여의도광장이 생각난다. 10여 년 전에 사라진 곳이다. 그런 상념은 광화문광장과 대비돼서만은 아니다. 지난 1일 국군의 날과 중국의 건국 60주년 기념식-. 이명박 대통령은 충남 계룡대 연병장에서 열병식을 했다. 중국 후진타오 주석의 인민해방군 열병식은 베이징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있었다. 군부대 계룡대의 잔디 연병장은 투박했다. 거대한 천안문광장에 비해 답답하고 초라했다.

천안문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 하지만 우리도 그런 게 있었다. 여의도광장이다. 크기도 비슷하고 유사한 쓰임도 있었다. 국군의 날 행사는 거기서 했다. 1997년 여의도광장을 폐쇄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공원을 만들었다. 여의도 광장은 군사 문화의 부정적 잔재라는 오명을 썼다. 그러나 그곳은 그런 현장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20세기가 살아 숨쉬었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최초의 비행사 ‘떴다 안창남’의 신화가 서린 곳이다. 1922년 그의 시범 비행은 민족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광복 사흘 뒤 상해 임시정부의 선발대가 잠시 머물렀다. 이범석·장준하·김준엽의 광복군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비행장에서 내렸다.

60년대 여의도 개발이 시작됐다. 베트남전 파병부대 환송식, 수출 기념식도 있었다. 비행장 자리에 광장이 들어섰다. 첫 이름은 5·16광장. 전두환 정권 때 국풍 행사가 벌어졌다. 군사독재 시대 학생·시민들은 여의도에 한번쯤 차출됐다. 관제 동원이다. 그곳은 민주화 갈증의 폭발 현장이었다. 87년 대선 때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는 100만 인파를 광장에 모았다.

20세기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다. 그 업적은 선도와 갈등, 독주와 저항 속에서 이뤄졌다. 여의도광장은 현대사의 그런 역동적인 무대였다. 세대·계층에 따라 광장의 체험과 추억은 다양하다.

그런 곳이 속절없이 사라졌다. 공원 변신의 국민적 공감대도 부족했다. 공원은 서울시 작품이다. 조순 시장 시절이다. 서울시는 공간의 효율성을 중시했다. 그 흐름에 편승해 사회 일각의 뒤틀린 역사관이 기승을 부렸다. 일류 아닌 삼류 얼치기 좌파들이 나섰다. 그들은 광장의 역사적 진실과 이미지를 왜곡했다. 광장을 독재와 군사문화의 현장으로만 매도했다. 광장의 상실은 편향된 역사 의식이 낳은 비극이다. 역사의 상상력 빈곤 탓에 광장을 잃었다.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다. 그는 임기 말 “여의도광장을 없애고 공원 조성은 문제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제동은 늦었고 조순 시장과 정치적 결별을 했을 때다.

여의도공원은 평범하다. 그 안 한국전통의 숲에 연못과 정자가 있다. 엉성하다. 외국인들이 일본 전통 연못과 비교할까 걱정스럽다. 10년여 전 공휴일 광장에서 평균 5만 시민이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여의도공원은 광장보다 효용과 접근성이 높지 않다. 여의도 공원은 임무를 완수했다. 도심 속 녹색공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재변신해야 한다.

여의도광장을 부활시켜야 한다. 남북 통일과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광장의 재탄생은 필요하다. 서울시 관계자가 말했다. “일부만 공원으로 쓰고 광장을 재생하면 된다. 나무는 다른 데로 옮기면 된다.” ‘안창남에서 민주화 폭발까지’를 담은 역사관을 그곳에 지을 만하다. 조선시대 이미지의 광화문광장과 현대사의 여의도광장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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