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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동티모르 학살 방관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동티모르에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주민투표에서 독립안 (案) 이 압도적 지지를 얻었음에도 이에 반대한 민병대가 승복을 거부, 독립을 지지한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있다.

현재 2백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2만5천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6일 하루에만 1백70명이 사망했다.

외신은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재현 (再現)' 이라고 현지 상황을 보도한다.

6일 민병대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카를로스 벨로 주교의 주교관을 공격해 이곳에 피신해 있던 주민 6천명 중 30여명을 살해하고 나머지 주민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또 국제적십자 건물을 공격하는가 하면, 호주대사에까지 총격을 가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7일 동티모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치안유지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AFP통신은 6일 인도네시아군이 민병대의 학살만행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으며, 독립을 지지한 주민들을 대량학살 또는 이주시켜 동티모르를 양분 (兩分) 하는 내용의 '플랜 B'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인도네시아군에 의한 치안유지는 기대할 수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일한 길은 유엔 평화유지군 (PKF) 을 파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 오는 11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담에서부터 동티모르 문제를 주요의제로 삼아야 한다.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미국의 소극적 태도다.

과거 걸프전과 인권을 내걸고 개입한 코소보사태에서 보여준 적극성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미국은 행동의 일관성 유지, 그리고 그동안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지배를 묵인해 온 전과를 고려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리 역시 동티모르의 비극을 외면해선 안된다.

정부는 이미 유엔으로부터 동티모르에 경찰병력 파견을 요청받고 이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국제화시대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고 살아가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줄 알아야 한다.

지난번 터키 지진참사 때 초동대처가 미흡해 구호단을 보내고도 제대로 생색이 나지 않았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17세기 이래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에 눌려 살아온 동티모르인들은 유엔 감시하에 합법적으로 치른 주민투표에서 독립국가의 길을 택했다.

그 누구, 그 어떤 이유로도 동티모르인들의 이같은 결정을 바꿀 수 없다.

인도네시아는 원래 약속대로 동티모르가 독립국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네시아는 국제사회에서 무도 (無道) 한 나라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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