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비평] 영화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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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시대의 페이지를 넘기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묵인했던 오랜 법과 제도, 우리에게 통용됐던 앎과 관습의 두터운 지각에 변동을 가져오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앞으로 취하게 될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말이다.

극단은 아니지만, 장선우 감독의 신작 '거짓말' 은 분명 어슬렁 넘어가고 싶었던 난처한 문제들을 데리고 왔다.

정사 장면의 노골성은 잔가지 쯤에 불과하다.

요는 '거짓말' 이 비공식적 지하 수로에선 차고 넘치도록 범람했으나 공식 유통망 내엔 진입할 수 없었던 우리 사회 성 (性) 의 '찐한' 현실을, 바야흐로 이제 갓 검열에서 등급제로 차원 이동 (?) 을 꾀하는 영화제도의 격동기에, 표현의 자유와 윤리적 한계 혹은 '대중 공간에서 상영 가능한 작품의 수위' 라는 문제와 더불어 강력히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알만한 이는 알거다.

나는 '화엄경' 을 위시하여 장감독의 최근까지의 영화적 행보에 호의를 지닌 사람이 아니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거짓말' 을 위한 변명 따위는 생각 없다.

다만 "사회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 가 있다며 '거짓말' 앞에서 오래 수심에 차 있는 이들에겐 그것이 매우 과민한 반응이라는 사실만큼은 말하고 싶다.

'거짓말' 의 변태적 성행위는 "건전한 가정생활이나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 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격렬하고 왕성한 성행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의 섹스는 풍자적인 의미에서만 사실성을 지닐 뿐이다.

선의의 해석이 아니다.

크레딧 타이틀 전후의 인터뷰와 빈번한 패스트 모션, 촬영 스탭과 기자재의 의도적인 노출, 희화적 사운드,점점 더 굵고 튼실한 몽둥이를 찾아 나서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서사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확실한 '거리두기' 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픽션, 즉 거짓말임을 누차 강조한다.

이 거짓말의 세계 속에서 살림을 차리고 노는 와이와 제이란 캐릭터가 또 그 자체 독특한 농담이다.

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 (無爲) 와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한단다.

'어린이되기' 를 간절히 상징하는 둘의 관계는 얼핏 즐거워 보이나 실은 지독히 우울한 풍경이다.

세계로부터 완강히 자기를 방어하려는 꿈의 허망함, 자라지 못한 어른의 비루함 - .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는 제이의 마지막 대사는 말하자면 환유다.

'거짓말' 은 현실의 경계에 선 애어른의 통과제의를 쓸쓸한 유머로 그린 것이다.

그럼 이 영화에 완성도가 있다는 얘긴가? 소재와 양식의 도발성 만큼 미학적 밀도가 높다고 말할 수 없음에 난 화가 난다.

중년의 피터팬 신드롬은 내 입맛엔 맞지 않는다.

'경마장 가는 길' 과 ' 나쁜 영화 '를 재탕한 것도 좋아보이지 않았고, 낭비도 많다.

잘난 체 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원작의 촌스러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 영화의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줄 알리바이는 되지 못한다.

시대는 요청한다, 새 기준, 제도, 미적 가치의 새로운 정립을, 토론을, 변화를. 더는 피하지 말기로 하자. 급격하다고? 원치않는 사람에겐 변화란 늘 도적처럼 들이닥치는 법이다.

게다가 지금도 늦었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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