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광장]중년이 더 아름다운 아줌마가수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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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겨울 모스크바 국립 로시야 콘서트홀에서 열린 대중가수 알라 푸가초바 (50) 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

북한 김정일 (金正日) 도 한때 그녀의 노래 '백만송이의 장미' 에 반해 북한 초청공연을 주선했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이 각각 그녀의 생일날 최고훈장을 수여하며 "남자로서 푸가초바에게 훈장을 줄 수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고 고백했다는 러시아의 '국민가수' 다.

폭설에도 불구하고 공연장 앞엔 "오, 알라" 를 외치는 10~60대 팬들이 옛 소련 시절 '레닌 묘' 참배객보다 더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표를 구하지 못해 그녀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온 이들이었다.

3백달러가 넘는 S석 표도 판매 즉시 매진됐기 때문이다.

30세의 고려인으로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유부녀 가수 아니타 최. 지난 5월 그녀의 2시간짜리 공연 역시 팬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팬들은 공연 후 꽃다발을 직접 전해주겠다며 30분 이상 무대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30대 중반의 라리사 돌리나. 지난 3월 그녀의 공연 때는 한 열성 팬이 공연장 입구부터 무대까지 온통 장미를 깔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30~60대의 늙은 (?) 아줌마 부대가 러시아 대중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다.

푸가초바.돌리나 외에 이리나 살티코바.마샤 라스푸티나.이리나 알레그로바.마리나 흘레브니코바 등 높은 인기를 누리는 가수들은 한결같이 중년이다.

몇번의 이혼 경력에 '빼어난 미모' 와도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라면 벌써 뒷전에 밀려 있을 법한 이들에게 러시아인들은 열광한다.

TV의 쇼.연예 프로들도 이들을 얼마나 출연시키느냐에 따라 시청률이 달라진다.

10대 가수는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

러시아 10대 소녀들 사이에서도 동년배 최고 인기그룹 '나나' 보다 푸가초바가 우상이다.

그녀의 헤어 스타일.화장법은 연령층을 뛰어넘어 모든 여성들의 교과서다.

왜 러시아에선 '아줌마 연예인' 들의 인기가 10대들을 뛰어넘을까. 러시아인은 "이들의 노래에는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세월의 흐름이 노랫말.연기,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시계는 지금도 간다. 옛날 그대가 나와 함께 했을 때, 그대의 귀가시간에, 기쁨을 노래하던 오케스트라처럼, 시간을 울리던 낡은 시계, 지금도 그 시계는 간다, 우리의 이별을 지켜보는 것처럼…" (푸가초바의 '스타린느예 치스' ) 동거하던 애인과의 결별, 이혼의 아픔을 노래한 이 곡은 발표된 지 30년이 넘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TV나 극장의 무대가 10대에게 온통 점령된 한국과 비교하면 퍽이나 낯선 장면이다.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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