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25. 창비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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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창비학교' 에 교가가 있었다면 70~80년대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혹은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운동권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직도 그 교가가 유효할까라고 물으면 더 이상은 아니다. 90년대를 지나며 창비 (창작과비평사) 의 행보는 훨씬 발랄하고 가볍다.

특히 최근 들어 '대중속으로' 의 움직임이 훨씬 적극적인 점을 감안하면 교가가 바뀔 때도 지난 셈이다.

시장경제의 논리와 창비 고유의 지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혹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며 고민하는 지식인 집단 '창비학교' . 사실 창비는 90년대초까지만 해도 하나의 대항세력으로 이미지가 지배적이었고 그 모습은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더 이상 이념적 논쟁만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와 자본의 논리는 창비를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킬 전망이다.

상징적인 변화의 신호탄은 창비의 산 역사인 백낙청 (白樂晴.61.서울대 영문학) 교수가 실무에서 2선으로 물러나고 고세현 (高世鉉.44) 사장과 최원식 (崔元植.50.인하대 국문학) 주간이 등장한 것이다.

高사장 등장의 의미는 남다르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으로 편집부 직원으로 출발해 편집국장.상무.전무를 거쳐 올 1월 사장이 된 그는 창비 역사상 경영을 책임진 사장 1호다.

지금까지 창비의 대표는 상근 사장이 없었고 대학교수나 평론가 같은 상징적 인물들이 명예직처럼 맡아왔다. 그래서 그의 등장은 전문경영인 제도의 도입과 세대교체적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것.

그는 "지금까지 기업임에도 동인 내지 운동그룹의 형태를 띠고 있던 창비에 기업 이미지를 적극 부여하겠다" 고 경영 방침을 설명한다.

97년부터 출판사 주간을 맡은 최원식 교수는 계간지와 단행본 출판을 총괄하고 있다.

창비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일찍부터 백낙청 교수의 신임을 얻어 창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출판물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는 "몇 사람이 창비를 몰고가는 시대로부터 여러 사람의 힘을 함께 구축해나가는 시스템의 전환이 목표" 라고 말한다.

편집인을 맡았지만 실무에서 일단 손을 뗀 백낙청 교수는 지난 1년간 미국에 머물다 이달초 귀국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을 창간해 오늘의 창비를 만들어 낸 백교수는 번잡한 활동과 거리를 두고 영문학을 좀 더 심도있게 탐구하고 현시점에서 민족문학론을 시대변화에 맞게 규정해 볼 것이라고 향후 활동을 설명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백교수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던 현실을 감안하면 창비의 '대부' (代父) 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창비 변화의 또 다른 축은 지난해 겨울 새롭게 영입된 4명의 신예 편집자문위원들이다.

김상환 (金上煥.39.서울대 철학) 교수.문화평론가 김종엽 (金鍾曄.36.한신대 사회학) 교수.진정석 (陳正石.36.서울대 강사) 씨, 한기욱 (韓基煜.42.인제대 영문학) 교수가 그들. 창비가 30대가 주축을 이룬 소장학자 4명 동시에 편집자문위원으로 발탁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교수는 그 동안 창비의 공백으로 남았던 현대철학분야의 폭을 넓히고 있으며 문화평론가 김종엽 교수는 영화.아동문학.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친 소양으로 창비의 다양성 심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진정석씨는 민족문학론의 터가 깊은 창비에서 젊은 세대의 문학이론을 공급하고 있고 한기욱 교수는 외국문학이론에 비중을 두고 있다.

편집위원 백영서 (白永瑞.46.연세대 사학) 교수는 "이들은 창비가 90년대 이후 지식인 사회의 동향을 읽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단행본에 대한 감각도 지닌 소장학자들" 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창비의 실무를 이끌고 있는 중추는 편집위원들. 현재 백영서 교수, 김영희 (金英姬.42.한국과기원 교양과정부) 교수, 박명규 (朴明圭.44.서울대 사회학) 교수, 시인 고형렬 (高炯烈.45) 씨, 임규찬 (林奎燦.42.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등 5명이 멤버를 구성하고 있다.

편집위원의 맏형격인 백교수는 계간지 특집이나 사회과학부분을 주로 담당하고 있으며 창비 편집자 출신으로 20년 가까이 창비와 인연을 맺고 있다.

김영희 교수는 여성학과 영문학 부분을 주로 맡고 있으며 노동해방문학 그룹에서 활동했던 임규찬 교수는 문학 전반을, 고형렬씨는 시 분야를 담당한다.

현재 미국 교환교수로 가 있는 박명규 교수는 사회과학쪽 편집.기획을 맡고 있다.

편집위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이구 (金二求.41) 편집국장은 실무 편집자들을 통솔하며 단행본 출간 최전선에 서 있다.

현재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이시영 (李時英.50) 씨는 80년 창비 편집장을 맡은 이후 지난해까지 대표이사 부사장을 지낼 만큼 창비와 고락을 함께 한 시인. 1세대와 2세대를 이어주고 창비 문인들을 담당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분단시대 역사학의 현재성을 진단한 글과 일제시대 좌우익 통일전선 운동 등을 연구하며 한국 현대사의 독보적 업적을 이룬 강만길 (姜萬吉.66) 고려대 명예교수, 백낙청 교수와 함께 창비 초기 멤버이자 작품을 조목조목 살피는 실제비평으로 민족문학론을 지탱해온 염무웅 (廉武雄.58.영남대 독문학) 교수, '농무' 등으로 민족시인의 한 전형을 보여준 신경림 (申庚林.64) 시인 등 창비 1세대 지식인들은 현재까지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창비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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