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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동안 광복절 日대사관앞 항의시위 이금주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태평양전쟁은 포성만 멎었을 뿐 우리 가슴 속에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겸허하게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고 피해를 배상할 때까지 계속 싸우겠습니다. "

이금주 (李金珠.79.여)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은 팔순을 앞둔 노구 (老軀)에도 불구하고 13일 광주에서 2백여명을 이끌고 상경, 탑골공원.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李씨는 광복절을 전후해 지난 90년부터 10년째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시위를 해오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李씨는 40년 20세때 서울에서 김도민 (金道敏) 씨와 결혼한 뒤 2년만에 일제에 남편을 빼앗겼다.

남편이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생후 8개월짜리 아들만 남긴 채 군속으로 끌려간 후 9개월만에 남태평양군도에서 전사한 것.

친정식구들과 함께 49년 광주로 이사, 한많은 삶을 살던 그는 88년 대일 (對日) 투쟁에 뛰어들었다. 칠순을 앞둔 나이였으나 "그냥 이대론 눈을 감을 수 없다" 는 생각이 사무쳤기 때문이다.

광주시 남구 진월동 아들 집 2층에 사무실을 내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광주유족회를 만들었다. 관련 자료.증언.주장 등을 효율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거의 잊은 일본어도 독학으로 다시 갈고 닦았다.

이같은 준비를 통해 92년 유족 1천여명의 이름으로 진사.배상청구 소송을 건 이래 지금까지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모두 6건. 그간 법정 증언과 현지 시위 등을 위해 일본에 41차례나 다녀왔다.

재판과정에서 李씨의 조리있는 주장과 철저한 소송준비는 일본 법조인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일본 변호사가 무려 69명이나 무료 변론을 나서고 일본 방문 때마다 일본 기자들이 수십명씩 붙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정부는 방관만 하고 있고 국민도 대부분 무관심한 게 안타깝습니다. "

李씨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문제는 유족들만의 일이 아니라 민족의 숙제" 라며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서둘러 국가적.국민적으로 대응, 일본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광주 =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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