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관청 서랍의 돈다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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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자체 간부 사무실을 전문적으로 털어온 절도범이 붙잡혔다.

전국 15개 관공서를 드나들며 2억원대의 금품을 털었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민원인을 가장해 사무실에 들어가 서랍을 뒤졌다고 한다.

여기서 세가지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관청 보안이 이토록 허술한가.

웬 간부들의 서랍에 돈이 그토록 많은가.

잃어버린 사람들은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

도둑이 활보할만큼 관청의 보안시설이 이토록 허술할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관청의 기밀문서를 손쉽게 빼낼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 기밀문서나 중요문건인들 제대로 간수되고 있는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그만큼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가, 특히 지자체의 경우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안전문 용역회사에 보안책임을 맡기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적어도 점심시간의 경우 돌아가며 당번제로 사무실을 지키는 게 상식일 터인데도 어떤 지자체도 이런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도난사건을 계기로 민원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보안시스템을 강화하고 당번제 활용을 통해 자체보안을 철저히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4월 고관집털이 절도범은 한 도지사 서울 사무실의 서랍을 열 때마다 돈다발이 툭툭 떨어졌다고 진술했다.

액수는 차이가 나지만 지자체 간부들의 서랍을 열 때마다 돈봉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절도범은 한 시청국장 서랍에서 현금 2백만원을, 다른 지자체 국장 방에선 1백30만원을 훔쳤다.

이러기를 10여차례 했다.

공금일수도, 개인 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둑의 진술이 기가 막힌다.

"고위 공직자의 돈은 남에게 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고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범행을 했다" 는 것이다.

도둑의 예상대로 15건의 절도 중 분실신고는 노트북PC 등 3건에 지나지 않는다.

신고를 못한다는 도둑의 예측이 결코 빗나가고 있지 않다.

이는 무얼 뜻하는가.

검은 거래가 아직도 지자체 관청에서 이뤄지고 있고 관청의 서랍에서 도둑맞은 돈이 바로 검은 돈이 아닌가 하는 일반국민의 의혹과 불신을 받기 딱 알맞은 것이다.

지난 고관집 절도사건 수사도 석연치 않게 끝나버렸다.

이번 사건도 배짱 좋은 절도범의 '재미있는 사건' 으로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지자체 단체장들의 비리사건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오늘이다.

작은 의혹을 덮을수록 큰 비리가 자리잡을 공산이 커지고 국민들의 의혹과 불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자체 단체장과 간부들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과 불신을 씻어내는 철저한 수사와 기강해이를 다잡는 획기적 자정 (自淨)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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