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친구] 오세영 시인의 백담사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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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겨울과 여름 한철을 한적한 산사 (山寺)에서 보내 버릇한 것이 최근 수년간의 일이 되어버렸다.

백담사 (百潭寺) , 풍광 좋은 내설악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그 아늑한 고찰에 몸을 의탁하면 절에 있는 처사 답지 않게 마음은 어느새 대청봉마루를 넘나드는 하얀 구름이 된다. 신선이 된다. 사람이란 처한 상황의 지배를 그토록 많이 받는 존재일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삶의 원시성과 본래성을 되찾는다는 것, 그리하여 그 순수하고 명징한 정신으로 성찰해 보면 세속에서 영위했던 우리들의 일상 삶이란 그 얼마나 헛된 망상과 욕망에 사로잡힌 것일까.

백담사에 머무는 며칠동안은 적어도 속진 (俗塵)에 더러워진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 보다 관대하고 보다 자비로운 새사람이 되어 하산할 수 있어 좋다. 그 마음가짐이 비록 오래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백담사와 인연을 맺어 자주 이곳을 찾게된 계기는 문학을 좋아하는 이 절 한 노스님의 배려에 기인한다. 마음이 심란하고 세상 만사가 귀찮은 수 년 전의 어느날, 무턱대고 이 절을 찾은 내게 이 노스님은 가타부타 말씀 없이 흔쾌하게 선방 하나를 내주셨던 것이다.

시에 관심이 많은 스님이기에 아마 내 시 한편쯤 좋아 했을지도 모르리라. 선문답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대화에서 스님의 선정 (禪定) 을 깨치지만 않는다면 쫓겨날 염려는 없을 테니까. 백담사의 하루는 물과 같이 흘러간다.

새벽 예불소리에 잠이 깬다. 목탁소리에 정신이 청명해진다. 백담 계곡에 가서 얼굴을 씻는다. 하이얀 물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어느새 하루 일과를 시작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우짖는다. 벌써 아침 공양시간이다. 그 정갈하고 청결한 산채 맛! 밖에 나와서 포행 (步行) 을 한다. 길섶의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이제는 친숙하다.

지난 겨울에는 임신한 오소리가 먹이부족으로 실신해 있는 것을 이 자리에서 구해 동물병원으로 보낸 적이 있는데 오늘도 운이 좋다면 그 산친구를 만날 수 있을 지.

포행에서 돌아오면 선방에 앉아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시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글을. 오후가 된다. 아무 책이나 하나 집어들고 살래 살래 부채를 흔들며 뒷쪽 언덕에 있는 '나의 나무' 를 찾아간다. 수령 100년이 실이 넘을 측백나무다. 그 나무 밑 등걸에 앉아 글을 읽는다.

어느새 오후가 되고 석양이 느릿느릿 깔린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온다. 얼음같이 찬물에 발을 담그고 오늘 하루를 명상해본다. 은은하게 백담사에서 범종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여름도 나는 백담사를 찾아야겠다. 자연과 더불어 이 속된 욕망과 집착을 훌훌히 벗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오기 위해.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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