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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MB에 저작권 탓하기 전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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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달 3일, 막 임명된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이 인사차 민주당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맞은 김효석 의원(‘뉴 민주당 플랜’을 입안한 민주정책연구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수석은 이명박 대통령(MB)의 중도실용 친(親)서민 정책의 뼈대를 세운 브레인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구상에 뉴 민주당 플랜을 참고했음을 간접 시사한 셈이다.

하지만 뉴 민주당 플랜은 정작 민주당에선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분배뿐 아니라 성장도 고민하고, 좌우대립을 넘어 창조적 융합으로 가야 한다”는 김 의원의 원안을 당내 강경파들이 ‘변절’이라고 비판해 논의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요즘 민주당에선 “MB 정권에 저작권료를 받아야 할 판”이란 말이 유행이다. MB의 히트작인 미소금융은 원래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이 내놓은 아이디어다. 대학생 등록금 후불제도 민주당이 발표한 ‘민생 살리기 7대 정책’ 중 하나였다고 한다. 민주당은 “언론이 한 줄도 안 써줘서 MB가 가로채 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MB 타도’ ‘악법 철폐’를 앞세우며 장외투쟁에 여념이 없던 당이 민생 정책 몇 가지를 외쳤다고 이를 부각할 언론은 없다.

민주당은 MB의 중도실용 친서민 노선을 ‘껍데기 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지역이나 이념,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누가 내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줄까”로 표심을 정하는 유권자들이 하나의 상수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MB에게 500만 표를 더 안겨준 세력, 요즘 MB의 지지율을 50% 가까이 올려주고 있는 세력이 이들이다. 부동층으로 분류되는 이들 중엔 서민·중하층이 많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신들의 눈물을 닦아줄 지도자로 여겼던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잇따라 사라진 지금 이들이 기댈 곳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민주당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민주당에선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실질적인 행동이나 정책이 보이지 않았다. 미디어법 반대 같은 장외투쟁과 당내 갈등만 부각됐다. 반면 MB는 ‘쇼’라는 비아냥을 무릅쓰고 연일 시장 바닥을 누볐고 친서민 정책을 풀어놓았다.

MB는 원래 정통 한나라당 멤버가 아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수성가해 서민의 신화로 각인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몇 달째 몸으로 뛰며 친서민 행보를 이어가니, 그를 뽑았다가 실망했던 사람들은 “그것 봐, 내 선택이 맞았잖아” 하며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서민들이 ‘포스트 盧·DJ’를 민주당이 아니라 MB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실망할 필요가 없다. MB가 ‘원조 친서민 정당’인 민주당의 게임 틀에 들어온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지난주 “만에 하나 MB의 중도 친서민 노선이 진심이라면 민주당도 (정책으로) 경쟁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MB의 진심 여부를 떠나 정책 경쟁으로 정치의 승부가 갈리는 시대는 이미 시작돼 있다. 민주당은 하루빨리 생활정치로 전환해 멋진 역전극을 이뤄내기 바란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