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아침 애들에게 선물할 ‘우리 완구’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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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추석 명절이다. 큰집에 모이는 조카들에게 조금씩 용돈을 나눠 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완구들을 사러 가주는 큰 선심을 쓰는 때이기도 하다. 디즈니, 파워레인저, 포켓몬, 닌텐도, 헬로 키티, 유희왕, 스타워스, 프린세스, 바비, 레고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완구가 크고 작은 마트에 진열돼 있다. 그 가운데 순전히 한국 완구라고 생각되는 것은 몇 종류나 되는지 눈여겨보신 적이 있는가.

유아용 완구 몇 종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개발된 것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100%가 일본·미국·유럽에서 개발되고 만든 것들이다. 왜 그럴듯한 한국 완구는 없는가. 완구는 제품화된 문화다. 문화로서 검증된 것만이 큰 개발비가 소요되는 완구라는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우리의 어린이 문화는 없는가. 30년 가까이 한국의 영화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이바지해 왔다고 자부하는 필자에게 또 한번 자책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성인을 위한 한국영화는 시장점유율에서 2006년 바닥을 찍고 ‘해운대’ ‘국가대표’ 등의 선전에 힘입어 50%의 시장점유율을 다시 회복하면서 상승 기류를 타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 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 변변한 애니메이션 하나 없고, 그럴듯한 완구 하나 없다. 어린이를 위한 영화는 제작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한국 어린이들은 방학 때 며칠을 빼 놓고는 영화를 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위한 모든 것은 교육으로 집중돼 있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교육사업만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교육의 도구일 뿐이다. 학습만화, 학습완구, 영재교육 출판 등등….

대학을 졸업해 봐야 ‘88만원 세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마당에 가정마다 자녀의 내신 성적을 올리고 대입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한 교육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다. 지난해 문화관광부는 우리나라를 문화 콘텐트 5대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문화 콘텐트 소비자의 절반인 어린이와 청소년을 둘러싼 기형적 교육·문화가 판치는 상황에서 문화 콘텐트 5대 강국이 된다는 건, 단언하건대 불가능하다. 차라리 학습 경시대회 3대 강국의 가능성이 오히려 더 가까워 보인다. 문화의 세기를 맞이해 교육·문화의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올봄 출범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1차 목표는 글로벌 콘텐트를 집중적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세계를 정복할 콘텐트를 우선적으로, 중점적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콘텐트가 세계화된 것이 글로벌 전략을 잘 수립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들은 내수시장을 만족시킬 콘텐트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자국 시장 안에서 혹독한 테스트를 거친 뛰어난 콘텐트가 오랜 세월 동안 차근차근 세계화된 것이다.

국산 휴대전화, 승용차가 세계화된 과정을 잠시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황폐한 국내시장은 내버려두고 한 건만 하면 생색이 크게 날 글로벌 프로젝트에 ‘몰빵’해선 안 된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순서가 있는 법이고, 문화와 교육은 백년대계가 필요하다. 일본을 공부하고, 한국 가전제품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본국을 탄탄하게 방비하지 않은 채 출정에 나선 왕조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웬만한 역사소설에 다 나와 있는 얘기다.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아이가 뛰려고 할 때 커다란 재난이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디즈니의 저 유명한 미키마우스를 생각해 보자. 올해 83세의 미키마우스는 수만 종의 상품과 테마파크로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 미키의 시작이 세계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던가? 역시 아니다. 디즈니 역시 자국 시장의 소비자들을 우선적으로 만족시키는 데 총력을 다했다. 자국 시장을 만족시키면 자동적으로 세계화될 수 있는 초강대국 시민으로서의 행운이 미국인에게는 있었다.

세계적인 문화 콘텐트를 만들어 내자는 데 반대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에도 순서가 있다는 얘기다. 수출 효과를 생각한다면 왜 수입 대체 효과는 생각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외국 문화 콘텐트에 파묻히게 놔두고, 해외 원정에만 눈이 팔려 있는 무심한 어른들 밑에서 크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이 불쌍할 뿐이다. 투표권이 없고, 자기 목소리를 낼 권리가 없기 때문에 겪고 있을 대한민국 아이들의 외로움이 조카들을 앞에 둔 추석 명절에 더욱 절절하다.

신 철 ㈜신씨네·㈜로보트태권브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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