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도전기 3국' 소강상태 견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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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38기 왕위전 도전기 3국
[제5보 (82~103)]
黑.이창호 9단 白.이세돌 9단

전투도 없고 특별한 변화의 조짐도 없는 소강상태를 조용히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승부사의 재능이 있다. 소위 '투사'들은 밋밋하고 단조로운 상황을 못 견뎌 하다가 사고를 친다.

미학을 추구하는 쪽도 평범한 수에 지친 나머지 종종 자살골을 넣고 만다. 오직 일류 승부사만이 이런 와중에도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며 은밀하고도 칼날 같은 긴장을 유지한다.

지금 바둑판은 움직임이 멎어버린 듯 조용하다. 82부터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서로 자기의 영역을 지킬 뿐 상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만큼 서로의 진영은 탄탄해 말단에서 작은 총성이 오갈 뿐 대세는 무료히 흘러가고 있다.

이세돌9단은 형세를 나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흑은 사방이 견고해 공격의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오버페이스를 밥먹듯 하는 이세돌이지만 지금은 도리없이 이대로 흘러갈 생각이다. 우하에서의 실패 이후 와신상담하고 있는 이창호9단은 상대의 98이 조금이나마 고맙다. 99가 좋은 수여서 흑은 한수 차이로 백을 잡고 있다. 이곳에 숨어있는 '늘어진 패'의 뒷맛이 깨끗이 사라졌고 계산도 조금 편해졌다.

두 사람이 장기전의 채비를 하고 긴 승부에 대비하는 가운데 바둑은 끝내기로 접어든다.

흑은 네 군데에 60집 정도의 집이 있고 백은 하변이 33집강. 그 외 상변과 좌변, 그리고 우변은 미정인데 이들은 과연 몇집이나 될 것인가. 20집이면 팽팽한 반집승부다.

사실은 고수일수록 이런 바둑이 어렵다. 수를 읽기는 쉬워도 계산은 어려운 법. 아직 바둑판은 중앙 일대가 빈땅 천지여서 어떻게 경계를 그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는데 이 긴 여정에서 한두집만 삐끗하면 그냥 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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