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독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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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시중에 떠도는 우스개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밥그릇 하나를 장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밥그릇에 밥을 지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막 밥을 먹으려다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밥그릇을 빼앗겼다.

全대통령이 실컷 먹은 밥그릇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盧대통령은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먹었다.

그런데 이 밥그릇을 김영삼 대통령이 잃어버렸다.

지금 이 잃어버린 밥그릇을 김대중 대통령이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 우스갯소리 중에는 그냥 웃어버릴 수 없는 번득이는 기지가 숨어 있다.

전.현직 대통령을 밥그릇 싸움에 비유한 이 기막힌 발상에는 해방후 반세기 우리 나라의 모든 정치 역정의 드라마가 그대로 풍자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로서 서양에서도 'Politics (정치)' 란 의미는 '야비한 일' 이라는 느낌으로까지 연상되고 있다.

따라서 선동적이며 저열한 정치꾼은 'Politician' 으로, 정치가를 'Statesman' 으로 구분해 왔는데 항간에 널리 유행되고 있는 이 우스갯소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정치가는 없고 오직 선동을 통해 밥그릇 싸움을 벌여온 비열한 정치꾼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해방후 반세기가 흘러가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는 이제까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모두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된 비열한 정치꾼들이란 말인가.

서글픈 대답이지만 아마도 단호히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시작으로 박정희.김영삼 대통령을 거쳐오는 동안 정치가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 자신들의 권력에만 집착해 있던 정신적 자폐아들이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도덕성이 떨어졌으며 걸핏하면 거짓말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공약 (空約) 의 전도사였으며, 정경유착의 검은 그늘에 살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신의와 지조가 없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눈앞에 이익이 있으면 서슴없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거리의 여인들까지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미덕이 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일이 국민을 위한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돌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패거리를 만들어 힘을 과시하는 조직깡패의 속성을 닮고 있으며 무엇보다 정치 그 자체가 그들의 밥벌이이자 유일한 직업이고 그것을 놓치면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정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정치란 국민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 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치적 타락의 근본 원인은 모든 최고 권력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권력을 세습화시키고 권력을 재창출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자신의 후계자를 세자 책봉으로 임명하려 했으며 그래야만 자신이 물러나더라도 영향력을 갖고 상왕 (上王)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악순환의 고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치의 개혁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는 극단적인 배짱으로 자신의 사후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려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가진 국민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물러난 뒤에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한 일이 있는데 분명히 말해서 권력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 하늘은 바로 민중이므로 권력이란 즉, 민중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인위적으로 세습되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여론조작을 통한 홍보작전이나 지역 감정의 교묘한 부추김에 의해 재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또 다시 목불인견의 정치판들이 벌어지고 있다.

말인즉 개혁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서바이벌 게임에 지나지 않는 밥그릇 싸움인 것이다.

왜 모를까. 국민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가야말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대정치가가 될 것임을 왜 모를까. 오 신이여, 제발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나이다.

최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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