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그러진 경찰관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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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탈옥범 신창원 (申昌源) 이 다시 교도소에 갇히고 난 뒤 그의 일기장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끝 모를 우리 사회의 타락상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申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중이던 경찰관이 申의 동거녀를 성폭행했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과 함께 수치심을 안겨준다.

범인을 숨겨줬다는 약점을 잡아 성폭행까지 한 행동은 공권력의 본분을 망각한 파렴치한 범죄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검찰 간부의 파업유도 발언과 마찬가지로 공권력의 존재가치를 의심케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고 친고죄라는 이유를 들어 형사책임을 묻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다. 경찰관이 직위를 이용해 인권을 짓밟은 것을 처벌할 수 없다면 이 사회의 법과 정의는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는 이 사건뿐만 아니라 申의 일기장에서 드러난 공권력의 심각한 해이와 부패에 큰 우려를 갖게 된다. 申은 동거녀 오빠의 폭행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서와 검찰청을 네차례나 드나들었고 형사에게 사례비까지 주었다고 한다.

경찰의 자체조사가 진행중이지만 성폭행 사건이 사실로 드러난 점으로 미뤄 아마도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에 검거령이 내려지고 수천만원의 현상금까지 걸린 탈옥범이 자신을 수배한 관청을 밥 먹듯이 드나들고 돈거래까지 했다니 공권력은 실종상태나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공권력이 이런 상태이니 申에게 강도나 절도 피해를 입고도 신고하지 않은 시민들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신고를 해봐야 피해품 회수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괜히 조사를 받느라 귀찮기만 할바에야 차라리 조용히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기대는커녕 불신과 경계의 대상으로 시민들에게 각인된 공권력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번 일은 타락한 일부 경찰관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범죄인이 고발자가 되고 공권력이 피고발자가 된 申의 일기장은 우리 경찰 내부의 도덕적 해이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경찰은 이번 기회에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한다. 스스로 기강을 잡고 국민 신뢰를 회복할 자체 개혁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메스를 들어야 한다. 사회의 각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개혁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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