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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7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제10장 대박

한철규는 잠시라도 새우잠으로 눈을 붙일 수 있었지만, 희숙은 온전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으므로 숙박료만 공중에 날린 셈이었다.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도 희숙은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근처의 해장국집을 찾아 아침요기를 끝낸 그들은 남대문시장으로 찾아가기로 하였다.

밤에 본 동대문시장의 인파에 기가 질려 버렸기 때문에 날이 밝은 후에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한철규는 희숙에게서 건네받은 쪽지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최근 중국의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몇 가지 품목이 적혀 있었다.

접는 자전거, 보온 내의, 자외선 차단용 크림, 단순한 감정 표현 능력을 가진 어린이 장난감, 자세를 교정해 주면서 지압효과까지 있는 밴드, 자기와 원적외선.음이온을 동시에 방출하는 자기침, 한번 올라가면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눈썹 고데기, 디자인이 다양한 머리핀, 휴대용 전화기에 부착하는 액세서리 같은 상품들이었다.

그토록 넓은 시장이었지만, 무작정 전문점포를 찾아 나선 것이 미욱한 짓이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젠 남대문시장에선 고유의 영역을 차지하고 괄시 못할 세력으로 등장한 노점상들의 리어카 좌판 사이를 밀리고 뚫어 가며 두 시간을 헤집고 다닌 뒤에야 가까스로 아크릴 재질의 머리핀을 생산.판매하고 있는 전문점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불과 스물대여섯으로 보이는 그 점포의 주인은 흡사 친절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한철규는 자신을 시골장터의 장돌뱅이로 소개했었는데, 전혀 시큰둥하거나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전화 걸기를 30여분이나 노력한 끝에 눈썹 고데기를 생산하고 있는 업체의 소재지를 알아 준 것도 그였다.

부채춤을 추고 있는 인형은 점포 아닌 노점상들의 좌판에서 발견하였고, 고등어 한 손에 단돈 천원에 싸구려를 부르는 좌판을 발견한 것도 노점상가에서였다.

1만원 한 장이면 살 수 있는 한 벌짜리 의류들도 부지기수라는 것을 발견한 것도 남대문시장 노점거리에서였다.

지방 읍내의 의류상가에선 5만원 내외에 팔리고 있는 진품의 청바지가 2만원대 가격으로 팔리고 있었던 것도 진기한 발견이었다.

쏘다니면 쏘다닐수록 머릿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한철규는 노점상 좌판에서 팔고 있는 갖가지 품목들의 가격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눈썹 고데기 전문 판매업체는 공교롭게도 동대문시장 인근에 있었다.

점포 주인은 그 상품이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상권에서도 점차 인기를 얻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점포는 주인도 여자였고,점원도 모두 스물한두살 또래의 여자들이었다.

상품은 의외로 사용하기 손쉽게 제작되었고, 외양도 크지 않아 휴대하기에도 간편했다.

외국으로 가져나가면 눅게 잡아도 50퍼센트 정도의 마진을 겨냥할 수 있다는 장담이었으므로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장수들의 거래상품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에다 자기침이나 아크릴 재질의 머리핀까지 곁들여 상품을 다양화시킨다면, 거래선 (去來先) 을 찾지 못해 중국땅을 우왕좌왕 들쑤시고 다닐 걱정도 덜어 줄 것 같았다.

시골 장터에서도 분명 수요가 있을 것 같았다.

여성용품과 아동용품은 혹독했던 경제불황의 와중에서도 다른 상품에 비해 매기의 명맥이 꾸준했었다.

매기에 타격을 받는다 해도 불황에서 조금만 벗어난다 싶으면 가장 재빨리 회복 기류에 편승하는 상품이 여성용 상품이었다.

심지어 여성용 잡지까지 그랬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점포를 나선 것이 점포들이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고객들을 맞이하기 시작하는 밤 9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오랜만에 배가 고팠다.

희숙도 어지간히 지쳤던지 두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한 일도 없으면서 공연히 가슴 뿌듯해요. 허름한 밥집이나 찾아내서 퍼질러 앉아 소주 딱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제수씨는 괜찮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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