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TV중계 변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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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여름철 TV의 백미는 스포츠 중계다. 특히 방송사들은 여름철에 시청자 가슴을 뚫어주는 스포츠 편성 시간을 늘인다. 야구장 파란 잔디 위를 날아가는 백구를 보면 무더위 짜증도 함께 날아가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지금은 경기장에 가는 것보다 TV를 보는 것이 현장 분위기를 실감나게 느낄 정도로 발전했으나 70년대 초만 해도 사정은 딴판이었다. TV화면은 '장식' 에 그쳤고 아나운서 목소리가 '무기' 였다. 이른바 라디오판 TV중계인 셈이다.

사실 스포츠 중계는 방송기술의 집결체.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방송이 한 단계 올라섰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수많은 카메라와 이동 중계차, 그리고 위성 등이 총동원되며 첨단기술의 총화를 보여준다.

가장 대중적인 축구를 보자. 70년대 중반까지는 카메라 2대로 꾸려냈다. 그것도 이동용이 아닌 고정용이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상단 관중석과 운동장 가운데에 각각 1대씩을 놓고 선수와 공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다른 경기도 사정은 동일했다. 반면 지난 3월말 열린 한국과 브라질 경기에 들어간 카메라는 모두 20대. 선수는 물론 감독 표정, 관중석 반응도 일일이 잡아챈다.

골인 장면을 전달하려고 양쪽 골넷에는 미니 카메라도 설치된다. 제작진도 50명을 넘어선다.

60년대 스포츠 중계의 스타는 아나운서였다. 임택근.황우겸.고 이광재 씨 등이 그들. 누가 마이크를 잡느냐에 따라 채널별 희비가 갈렸다. TV화면은 보조적 수단. "고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하는 소리 한마디에 많은 이의 귀가 쫑긋해진 때였다.

70년대 중반 이동용 ENG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스포츠 중계도 변화한다.

평균 5~6대가 설치됐다. 인기의 축도 아나운서에서 신문기자 출신의 해설자로 옮아갔다. 권투의 오일용, 농구의 오도광, 축구.럭비의 윤경헌, 야구.농구의 노진호, 축구.격투기의 고두현씨 등. 80년대는 스포츠의 비약기로 기록된다.

프로야구.프로축구.민속씨름 등이 선보이고, 컬러방송이 도입되면서 무게비중도 음성에서 화면으로 이동했다. 선수출신의 해설자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엔 선수들 움직임이나 공의 흐름을 칠판의 글씨처럼 알려주는 비디오 라이터 등 첨단기기가 등장하면서 현장보다 집에서 보는 것이 편한 시대로 탈바꿈했다.

국내 스포츠 PD 1호로 꼽히는 김재길씨의 회고. "60년대 초엔 레슬링이나 권투 선수들이 흘리는 피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들을 조문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죄책감도 느꼈던 것이지요. " TV 중계차가 첫선을 보인 때는 62년. 흑백 카메라 두 대가 고작이었지만 70년말까지 맹활약했다.

최초로 중계차가 투입된 경기는 그해 4.19 기념 장사씨름경기. 위성방송 중계는 70년초 금산지구국 개국 이후 4월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자이언트 바바와 김일의 레슬링 경기로 기록된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 방송사는 거의 모든 종목을 중계하는 기술력을 쌓게 된다. 반면 아직도 도전하지 않은 유일한 경기는 장거리 도로 사이클. 아직 대중적 인기가 없을 뿐 더러 내리막길 경주속도가 워낙 빨라 카메라맨이 목숨 (?) 을 걸고 오토바이를 타야한다는 고충이 있다고 한다.

이밖에 42.195㎞를 무료하게 달리는 마라톤과 오랜 시간 진행되는 골프가 중계하기에 어려운 종목으로 꼽힌다. 좁은 장소에서 승부가 신속하게 갈리는 태권도.유도 등 격투기는 쉬운 편에 속한다.

"2002년 월드컵은 디지털로 중계돼 또 한차례 변신이 시도될 전망입니다.

" 이규창 KBS 스포츠국장의 말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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