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꿈꿨는데 태종 역할밖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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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적 등 과거사 규명을 둘러싼 논란으로 정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일단 공은 국회로 넘어가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과거사 진상규명특위를 제안해 이 정국을 점화한 당사자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의 '역사 정리'에 대한 의지는 일과성이 아니라 확고해 보인다는 게 청와대 핵심 참모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참모들에게 "나는 세종이 되고 싶었는데 태종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고 토로를 한다고 한다. 지난해 "새 시대의 장남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역할에 머무를 것 같다"고 했던 발언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세종보다는 '왕자의 난'을 겪으며 조선조 초반을 정리하고 넘어갔던 태종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한 회의에서 '역사 정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참석했던 한 참모가 전했다.

"역사 정리의 토대는 참여정부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야당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 나는 상도동.동교동이 함께 정치의 주류가 돼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염원했다. 6월 항쟁 때문에 나는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3당 합당으로 역사는 다시 왜곡됐다. 제대로 된 역사라면 어떻게 김종필(JP) 총재가 YS 정부의 권력 전면에 나설 수 있었겠느냐. 민주화의 많은 진전을 가져온 DJ 정부도 DJP연합으로 근본적 문제 제기엔 한계가 있었다. 참여정부는 그런 조건에서 자유로워졌다. 국가 기관들도 이제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전에도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3대 요건은 역사의식과 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라며 "YS는 권력 장악에는 탁월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청산해야 할 이 땅의 기회주의가 다시 때를 만났기 때문에 그를 지도자로 부르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했었다.

한 핵심 참모는 "노 대통령은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 정권과 민주화의 진전을 가져온 양 김 시대 모두 역사 정리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판단한다"며 "크게 보아 제3기인 현 정부가 바로 역사 정리의 적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총선 결과 과반 여당의 탄생으로 입법과 제도적 접근을 추진할 흐름이 만들어진 것도 노 대통령의 결심을 앞당긴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경제 활성화와 역사 정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단호한 듯하다. 노 대통령은 한 회의석상에서 "박정희 정부 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소득 1000달러 시대에 대비한 장기적 토대를 구축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소득 1만달러 시대의 분기점을 넘어선 지금도 2만달러 선진시대에 대비한 역사 정리로 질적 업그레이드의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요즘 "과거사 규명은 대통령 후보 이전부터 염두에 두어 온 것이며 최근의 야당을 겨냥한 게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 "처벌에는 시효가 있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는 시효가 없다" "질서있게 지혜를 모아나가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여전히 '정치적 의도'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 당국자조차 "시민단체 관계자를 만나보니 이 정국의 끝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고 할 정도의 분위기다. 무엇보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해 달라는 것은 여권 전체가 명심해야 할 국민의 주문이기도 하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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