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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국제왕따' 전락…유럽각국서 중재판정 무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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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세계무역기구 (WTO)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무역분쟁이 속출하지만 분쟁조정에 손도 못 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미 판정이 내려진 것도 결과를 거부하는 사례가 잇따라 WTO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난 4월 임기가 끝난 루지에로 사무총장 후임 선출이 난항을 겪으며 지도부 공석상태도 장기화하고 있다.

지난 95년 '세계무역 자유화' 를 기치로 내걸고 화려하게 출범한 지 4년만에 총체적 난국에 처했다는 분석이다.

◇ 마비된 중재능력 = 유럽연합 (EU) 은 WTO가 최근 EU의 미국산 '호르몬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가 잘못됐다고 판정하자 "미국.캐나다산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전혀 없다" 고 13일 선언했다.

미국은 이에 발끈했다.

미 무역대표부의 수전 에서만은 14일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EU는 WTO 판정을 준수해야 한다" 며 "전세계적으로 WTO의 분쟁조정 결정을 무시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며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앞서 지난 4월 미국과 EU간의 바나나전쟁에 대해 WTO가 미국측의 승리로 판정한 데 대해서도 프랑스는 "받아들일 수 없다" 며 즉각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무역전쟁이 격화되면서 반덤핑제소가 급증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조정기능도 사실상 마비상태다.

지난 5월 기준 WTO에 계류된 반덤핑관련 1백75건의 분쟁 가운데 1백17건은 양측의 입장차이가 확연해 해결이 요원한 상태다.

차기 사무총장 선출이 17개월째 늦어지는 것도 난마처럼 얽힌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하고 각국에 끌려다닌 결과란 분석이다.

◇ 왜 무기력해졌나 = WTO가 이처럼 무력해진 것은 아시아 위기 이후 무역현안을 WTO의 울타리 안에서 해결하는 '다자간 협상'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WTO가 출범한 95년과 달리 97년 아시아 위기 이후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달라져 다자간 협상으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박번순 수석연구원은 "수출확대로 활로를 찾으려는 아시아 및 유럽국가들과 무역적자로 고심하는 미국 등의 입장이 맞부닥치는 바람에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고 말했다.

◇ 걱정되는 뉴라운드 협상 = WTO가 휘청거리면서 오는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되는 뉴라운드 협상의 전망도 어두워지고 있다.

WTO를 출범시킨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과 달리 이번 라운드는 워낙 이슈가 다양하지만 농산물 수입개방.전자상거래 (EC).환경.노동.경쟁정책 등 각 분야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해 이의 조정이 쉽지 않아 선진국들이 협상시한으로 정한 3년을 넘길 것이란 분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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