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유작전과 나'] 소설가 박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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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1970년 처음으로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았다. 소규모 전시회였고,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성황이라기 보다는 조촐한 정도였는데도 충격을 받았다. 아마 높은 그림값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이란 먹고 살만해진 연후에 찾게 마련이다. 좋은 그림이 제 값을 받기 시작했다는 건 우리가 배고픈 설움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걸 누려야할 예술가는 이미 고인이 돼있었다. 그때 나는 40을 바라보는 평범한 주부였는데, 느닷없이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게 내 안에 뜨겁게 점화되는 듯한 느낌을 맛봤다.

나는 박수근과 함께 휴전 회담이 성립되기 전 전시 (戰時) 의 서울에서 같은 직장에 근무한 적이 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 8군 PX에서 그는 싸구려 초상화를 그렸고, 나는 초상화를 그리도록 '꼬시는' 호객 행위를 했다. PX 밖에만 나오면 깡통 찬 거지떼들이 엉겨붙어 발길을 떼어놓기도 힘들 때였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그 배고프고 누추한 시대를 오직 한 가지 재주, 화필 하나로 어떻게 살아남았나 증언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였다. 그렇게 해서 처녀작 '나목' 을 쓰게 됐으니 그의 유작전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최초의 창작욕이 예술가는 지지리도 고생만 하다 죽고 엉뚱한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거래하고 이득도 취한다는 게 분해서 항의하고 싶은 열정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의 불우했던 시절과 높은 그림값과의 괴리를 비극적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 않았나 싶다.

그 후 그의 회고전이 열릴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봐왔는데, 이번 호암갤러리의 박수근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사후 최대 규모일 듯 싶다. 아마 그는 우리 미술사상 가장 광범위한 사랑을 받는 화가인 동시에 가장 높은 그림값이 매겨진 화가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보통 사람의 소장욕이 미치기에는 너무도 먼 그림값이 오히려 보통 사람들도 욕심없이 감상할 수 있는 공유의 자산이 될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는 생전에 대접은 못 받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입에 풀칠하기 급급했을 때 그도 화필 하나로 가족의 최저 생활을 유지했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만큼 그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서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 생활을 유지했을 것이다.

한번도 평균치 한국인보다 잘 살아본 적이 없이 그 안에 머물면서 그들과 애환을 같이 하고 애정을 나눈 생활인의 태도가 그의 예술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생명력의 근원이 됐다고 생각할 때, 그가 부자가 돼보지 못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박완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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