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한 유통구조 '가짜미술품 천국' 오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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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국보급 미술품 1천여점을 대량 위조해 유통시켜온 위조범과 화랑주들이 적발된 사건으로 미술계가 술렁거리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엔 전 한국고미술협회 간부와 감정위원이 포함돼 있어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인사동 화랑가는 "가뜩이나 화랑 경기가 좋지 않은 판국에 소수에 불과한 비양심적인 업자들로 인해 이제 인사동에 나온 미술품은 죄다 가짜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될까 걱정" 이라는 침울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위작이 횡행하는 현 풍토를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무엇보다도 위작이 발을 붙일 수 없는 환경이 되려면 유통 구조의 투명성이 확립돼야 한다는 게 미술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고미술품의 경우 '가짜 아니면 도난품'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은 것도 대부분의 거래가 미술품의 출처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소위 '나카마' 로 불리는 중개인이나 화랑주인의 말만 듣고 이뤄지기 때문이다.

고미술 전문 D화랑 사장은 "미술품 소장 사실을 밝히기 꺼려하는 풍토이기 때문에 물건을 갖고 온 사람에게 '어디서 났느냐' 고 묻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돼있다" 고 설명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는 다르다.

골동품을 비롯한 미술품 전반의 거래에는 항상 '작품 이력서 (provenance)' 가 따라다닌다.

마치 주민등록등본과 같다.

여기에는 미술품이 개인 컬렉터나 화랑.미술관 등 소장처를 옮길 때마다 구입처와 일시가 명기된다.

한 미술관 관계자는 "솔직히 고도의 위조기술로 만들어진 위작은 경험많은 화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1백% 알아낼 수 없는 게 사실" 이라며 "소장처뿐 아니라 전시에 출품된 내용까지 기입하는 '작품 이력서' 가 정착되면 대부분의 위작 유통을 막을 수 있다" 고 말했다.

또 암거래의 원천적 봉쇄를 위해 거래 후 5~10년동안 발급 영수증을 보관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공신력 있는 미술품 감정이 부재하는 현실도 시급히 개선이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현재 국내 공식 감정기구는 고미술협회와 화랑협회의 감정위원회가 유일한 상황. 하지만 미술계에는 화랑들조차 "화상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협회 산하의 감정위원회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판정을 내릴 수 있느냐" 고 말할 정도로 회의적 시각이 팽배해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국가에서 전문가를 중심으로 감정위원을 위촉하는 형식의 공식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고미술협회 감정위원은 "미술품을 감정할 때마다 진짜로 판정하지 않으면 청부살인하겠다는 협박을 한두번 받은 게 아니다" 고 토로한다.

이해관계를 떠난 제3자적 위치에서 신분 보장을 받지 않는 한, 자의든 타의든 '정실 감정' 의 불씨는 상존한다는 얘기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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