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19. 현대한국연구모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한국정치사를 다시 쓰겠다는, 그래서 한국 정치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야무진 청사진을 내미는 소장학자들이 있다.

'현대한국연구모임' 이란 간판을 내걸고 모인 이유는 이렇다.

국내 학자들에 의한 한국정치사 연구가 있다고는 하나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특히 국제사회에서 한국정치사는 외국 학자들에 의해 역사적.이론적 의미가 해석돼 왔다는 점, 그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모국어가 아닌 영문으로 된 10권의 '한국정치사 시리즈' 를 내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이랬다.

이 모임의 간사격인 김병국 (金炳局.40.고려대 정외과) 교수가 95년 교환교수로 미국 하버드대에 갔을 때다.

김교수의 스승인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조지 도밍게스 교수가 김교수에게 "

하버드가 한국과 교류하고 싶다" 는 제의를 했다.

한국은 21세기 아태지역의 중추로 떠오를 가능성 있는 나라였고 동아시아지역에서 정치학의 논의가 가장 활발한 곳이란 점이 그들이 교류를 요청한 주요 이유였다.

귀국 후 김교수는 모임의 좌장격인 서진영 (徐鎭英.57.고려대 정외과) 교수와 협의, 광복 이후 김영삼정부까지를 정리할 '한국정치사 시리즈' 출간기획을 내놓았고 미국쪽에서 먼저 이를 출판하기로 한 것. 첫 작업으로 '박정희시대' 를 집중 조명한 연구서 3권이 내년 여름 먼저 나오고 다시 6개월쯤 뒤 국내에서 한국어로 출판할 예정이다.

서교수가 현대한국연구모임의 초창기를 소개한다.

"98년 2월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연구역량을 총집결해 세계에 알리는 기회인 만큼 정치뿐 아니라 행정.사회학등 각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위촉했고 새로운 관점을 위해 40대 전후의 소장학자들이 멤버의 중심이 되도록 했습니다. "

이 모임에 참여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공하면 새 바람이요 실패하면 웃음거리" 라는 말을 한다.

그들이 모인 이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이 모임의 구성과 시도는 계속 지적돼 온 기존 학계의 맹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만큼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기대 만큼의 비판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에서 3공화국 시절 '왜 유신이 종말을 고했는가' 를 집중 조명할 사회학자 임현진 (林玄鎭.50.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내용이 관건이다.

그러나 희망적이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참여학자들이 각 작품을 서로 검증해 한 목소리를 낼 것이며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들이 서로 섞여있다는 점은 오히려 더 큰 장점" 이라고 전망한다.

우선 비교정치학 분야에는 무게 있는 정치학계의 중진이 선두에 서고 뒤에 신예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중진급으로는 중국과 북한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그 학문적 업적을 쌓아온 서진영 고려대 국제학대학원장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최장집 (崔章集.56.고려대 정외과) 교수가 상징적 리더격이다.

서교수는 김병국 교수와 함께 미국 하버드대 교수들의 인맥을 바탕으로 이 모임을 주도해 왔으며 '박정희시대의 정치사회와 문화' 부분의 집필에 참여한다.

올해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때아닌 색깔논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던 최교수는 8월 미국 코넬대학의 연구교수를 맡아 출국할 예정. 그는 미국에서 '박정희시대의 역사적 유산' 에 대해 집중연구해 글을 낼 작정이다.

또 한국 민주화 과정의 분석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임혁백 (任爀伯.47.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정치사적 입장에서 왜 유신이 나왔는가라는 주제를 푸는 연구분야를 맡았다.

한국전쟁에 대해 주목끄는 연구실적을 갖고 있는 박명림 (朴明林.36)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실장은 촉망받는 신예학자. 이번에는 제3공화국 당시 '재야' 분석에 도전한다.

또 선거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예리한 장훈 (張勳.37.중앙대 정외과) 교수는 민주공화당의 출범에서 실패까지를 정부.당.선거와 관련지어 조명할 예정이다.

국제정치학 분야에서는 국제 정치.경제.국가안보 등의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문정인 (文正仁.48.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정치 패러다임이 바뀌는 이유와 아이디어의 진화를 바탕으로 '근대화 전략의 발전과 진화' 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야심을 구체화하고 있다.

또 한.미.일 3자 관계에 관한 연구에 천착해온 신욱희 (申旭熙.38.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한미안보관계를 들여다 볼 작정이다.

이밖에 김영호 (金映浩.40. 성신여대 정외과). 백창재 (白昌宰.39.가톨릭대 정외과).이정훈 (李政勳.38.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젊은 학자들도 '모래시계 세대' 의 독특한 관점으로 현대정치사에 접근할 전망이어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행정학.사회학 등 사회관계 분야의 연구진 중에는 특히 소장학자들의 분발이 더욱 기대되는 분야. 일본 국가와 기업의 관계.조직관리에 관해 탁월한 성과를 이뤄온 염재호 (廉在鎬.44.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와 노동정치 전문가로 남미의 경험을 참고해 노동세력에 대한 예리한 역사학적 시각을 제시해 온 송호근 (宋虎根.43.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 그 면면이 화려하다.

신용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