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 “싼 게 최고” 주변 주유소는 “매출 급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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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12면

경기도 일산에 이달 초 문을 연 농협 마트 주유소에서 24일 차량들이 주유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24일 오전 경기도 일산시 대화동 농협 하나로마트 내 ‘NH-OIL 주유소’. 휘발유 L당 1619원, 경유 1380원으로 적힌 가격표가 주유소 안 깊숙이 세워져 있는데도 차량들이 끊임없이 들어서고 있었다. 농협중앙회가 이달 1일 마트 주유소 1호점으로 문을 연 이 주유소의 판매가가 인근보다 휘발유는 L당 20여원, 경유는 30여원 싸기 때문이다. 이 주유소엔 시간당 60대, 많게는 85대까지 차량이 들어온다. 하루 평균 1000대가 들러 4600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대화동 근처는 물론 일산 전체에서도 가장 많다. 이 주유소 김재원 소장은 “지역 주유소를 고려해 조심스럽게 영업을 하지만 입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며 “차량이 몰려 엉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만원 이상 주유하면 무료로 해주던 세차를 일주일 전부터 유료로 바꿨다”고 말했다.

물가냐 지역경제냐, ‘제2의 SSM’ 마트 주유소 현장

한 시간쯤 뒤 이곳에서 2㎞가량 떨어진 탄현역 부근의 한 주유소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휘발유와 경유 모두 농협 주유소보다 10원 비쌌다. 40여 분간 기름을 넣기 위해 들어오는 차는 3대에 불과했다. 하루 300대가 넘던 주유차량들이 이달 초 농협 주유소가 문을 열면서 25%가량 줄었다고 한다. 이 주유소 사장은 “대부분의 고객이 농협 주유소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데도 이 정도”라며 “주야 2개조로 나눠 근무하던 직원을 8명에서 4명으로 줄였지만 적자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구성 이마트 주유소는 하루 매출 1억원
대형 마트 주유소의 파괴력은 예상보다 강했다. 자유로 이산포나들목에서 탄현역에 이르는 일산서구 30여 개 주유소의 평균 판매가격은 지난달에 비해 유종별로 30~40원가량 하락했다. 일산지역에서 가장 비싼 장항나들목 일대에 비하면 L당 최고 200원까지 차이가 난다. 본사의 입김을 많이 받는 직영 주유소보다 개인들이 운영하는 자영 주유소들의 가격 인하 폭이 크다. 금촌으로 통하는 길 옆의 한 셀프 주유소는 아예 농협 주유소보다 무조건 10원씩 싼 가격표를 붙이고 있다. “손해 보는 건 둘째 치고 일단 팔아야 하지 않느냐”는 게 이들의 하소연이다.

답답한 마음에 농협 주유소를 찾아가 기름 넣는 차들을 지켜보는 사장들도 적지 않다. 탄현동 일흥주유소 김용현 대표는 “휘발유 판매 마진 80원 중 카드 수수료 30원을 제하면 실제로 남는 건 50원뿐”이라며 “부지 임대료와 직원들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어 사업을 접을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다른 주유소들도 “마트 주유소를 내려면 주유소가 적어 폭리를 취하는 지역에 낼 것이지 왜 하필 경쟁이 치열한 이곳에 냈느냐”며 한숨을 쉬고 있다. 이 지역의 한 주유소는 최근 몇 달 새 주인이 네 번 바뀌었다. 매물로 나온 주유소도 여러 개다.

이 같은 사정은 국내 첫 마트 주유소가 들어선 용인 구성지역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연말 문을 연 이마트 구성점 주유소엔 24일 오후에도 차들이 북적거렸다. 입구엔 휘발유 1587원, 경유 1368원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가까운 곳보다는 평균 L당 60~80원, 분당 등지보다는 150~200원 싼 값이다. 주유기마다 순서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두세 대씩 꼬리를 물고 있었다. 큰길에서 접어드는 50m가량의 진입로에까지 차들이 빼곡했다. 주말엔 큰길까지 차들이 늘어서기도 한다는 게 주유소 관계자의 말이다. 이곳을 찾는 차량은 하루 2000대, 휘발유를 넣는 승용차가 많아 하루 매출이 1억원을 넘는다. 처음 문을 열 땐 오전 10시부터 운영했지만 고객들의 요청이 빗발쳐 영업시간을 오전 6시로 앞당겼다. 1000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탱크론 이틀을 버티기 힘들어 거의 날마다 유조차가 들어와 기름을 채워 넣는다.

몇 달 동안 ‘무시’ 전략으로 버티던 인근 주유소들도 3주 전부터 기름 값을 내리기 시작했다. 휘발유 최저가가 1608원, 경유는 1379원까지 떨어졌다. 이마트 주유소가 셀프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는 가격이다. 이마트 주유소와의 가격 차이는 가까울수록 작고, 멀수록 크다. 그런데도 장사가 안 된다고 인근 주유소들은 아우성이다. 이들은 많게는 50%, 보통 30~40%의 매출 감소를 겪고 있다. 롯데마트가 경북 구미에서 운영 중인 주유소도 주변보다 80~100원 낮은 가격으로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하루 매출액이 9500만원에 이른다. 주변 주유소들의 매출이 30%가량 잠식됐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소비자 “기름 값 더 내려가야”
반면 소비자들은 신이 났다. “싼 게 최고”라는 반응이다. 일산 농협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나오던 이성철(28)씨는 “우연히 한 번 들렀다가 기름 값이 싼 걸 알고 다시 들렀다”며 “인근 주유소는 경유 값이 1400원을 넘는데 여긴 1300원대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부인과 함께 용인 이마트 주유소를 찾은 장지화씨는 “내가 사는 분당과는 L당 150원 차이가 난다”며 “시간과 발품 좀 들여도 되도록 여기에 와서 주유한다”고 말했다. 구미시 상모동에 사는 주부 권해영(34)씨도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저렴하게 기름까지 넣을 수 있어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마트를 이용하지 않고 주유소만 들르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유가가 무조건 주유소 탓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산에 사는 김성진(40)씨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마진으로 파는 곳과 생계를 위해 적정 마진을 붙여야 하는 곳은 처지가 다를 것”이라며 “세금과 정유사 이윤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용인에서 만난 한 30대 주부도 “누구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름 값이 좀 내려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주유소들도 소비자들의 이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망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일산서구 지역의 일부 주유소는 최근 서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초 주유소 부지가 아닌 주차장에 농협 주유소를 허가해준 것이 월권이므로 취소하라는 내용이다. 이들은 “도시계획법상 주유소 부지를 어렵게 분양받아 막대한 투자를 하고 주유소를 냈는데 농협 주유소가 들어서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다”며 다음 달 22일 예정된 법원 선고에 기대를 걸고 있다.

마트 주유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지역에선 갈등이 더 심하다. 전북 군산에선 이마트에서 주유소를 내려 하자 지역 주유소들이 사전조정 신청을 했다. 기업형수퍼마켓(SSM)처럼, 대기업이 지방 자영업자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이유다. 지자체들도 이들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롯데마트가 경남 통영에 내려던 주유소는 시 의회가 “25m 폭 이상의 도로에 면해 있어야 한다”는 조례를 새로 만드는 바람에 벽에 부딪혀 있다. 이런 지역이 전국에 18곳이나 된다는 게 주유소협회의 집계다.

외국어대 임기영(경제학) 교수는 “물가로 보면 늘려야 하고 친서민·중소기업 정책으로 보면 규제해야 하는 게 마트 주유소”라며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목표가 상충되는 정책일수록 시장원리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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