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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 관행을 깨는게 개혁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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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연이은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정부.여당의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이제는 아침 신문 보기가 겁이 난다" 는 정부.여당 관계자의 탄식에 동정심마저 일 지경이다.

한때는 그렇게 인기가 좋던 정부가 왜 이 모양인가.

기득권 세력이 정략적 목적에서 매번 사건을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이라고?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건이 터졌다 하면 대안을 제시해야 할 책무는 까맣게 잊고 그저 '이 때다' 하고 저급한 비난이나 퍼붓고 의혹이나 부풀리는 야당의 정치행태를 보면 그런 변명에 전혀 일리가 없진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원인의 전부도, 근본적인 원인도 아닐 것이다.

일이 꼬이기만 하는 게 전적으로 기득권층이나 야당의 책략이요 음모때문이라면 현 정권의 우군이었던 재야나 시민단체마저 요즘에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언론이 그 보수적 체질 때문에, 또는 상업적 취향 때문에 무책임한 마녀사냥을 하는 데 사건확대의 원인이 있다는 정부쪽의 불만도 들린다.

이것 역시 전혀 근거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 언론 중 다수가 보수적인 체질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상업적 경쟁 때문에 그동안의 보도내용 중에 과장되거나 부정확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된 책임을 언론에 돌린다면 그거야말로 마녀사냥일 것이다.

'보수적' 운운 하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현 정권의 정책과 성격은 진보적.개혁적이었단 말인가.

대북정책 하나를 제외하고는 과거정권보다 더 보수적이란 비판마저 받는 판에 언론을 향해 '보수적' 운운 할 계제는 아닐 것이다.

또 일부 언론보도에 다소 과장되고 부정확한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언론이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이상 언론에 화살을 돌리려는 건 책임회피책밖에 안된다.

문제의 근본원인은 과거의 잘못된 관행이 그대로 온존하고 있는 데 있다.

고문조작시비, 도청 및 감청논란, 국회 529호실 사건, 돈선거, 고관집 도둑사건, 옷로비 사건, 검찰의 파업유도설, 손숙사건 등 현 정권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사건들을 분석해 보자. 이들은 하나같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사건들이다.

과거에는 도청 및 감청이 없었던가.

언제는 여당이 돈선거를 안했는가.

공안기관들이 대책회의를 갖고 노조 분쇄책을 논의하는 것은 지난날에는 으레 하던 일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현 정권을 괴롭히고 있는 사건들은 '구악 (舊惡)' 이지 결코 신악은 아닌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권만 일방적으로 코너에 몰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 정권의 오만과 협량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여당 인사들로부터 자주 듣는 불만이 "외환위기를 극복한 게 누군데…" 라거나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데…" 하는 것이다.

발상이 이러하니 잘못된 관행을 미처 혁파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보다는 책임을 기득권 세력의 음모나 언론의 무책임한 마녀사냥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상류층에 그 신분과 지위에 걸맞은 책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런 책임의식 부재 (不在)에서 비롯된 잘못된 관행이 여전히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대로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손숙 (孫淑) 씨 사건도 이런 풍토에서 빚어진 것이다.

현 정권에 실망하는 국민들이 늘고 있는 것은 현 정권이 잘못된 관행의 원인이라서가 아니라 잘못된 관행을 변함없이 온존시키고 그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과거 같으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문제들이 하나하나 큰 정치적.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하고 성숙해졌다는 증거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으로 불거지는 문제만이라도 '그렇지 않아도 손보려 했는데 마침 잘 됐다' 는 자세로 하나 둘씩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면 굳이 인위적으로 거창한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더라도 국민의지와 박수 속에 개혁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흔히 하는 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굴러든 계기를 오만과 협량 때문에 곳곳에 대고 화내고 책임 떠넘기느라 놓쳐버리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다.

정부는 일이 불거지는 대로, 잘못된 관행이 드러나는 대로 과감히 그것을 깨야 한다.

그런 관행과의 전쟁이 바로 개혁이다.

도덕론을 강조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관행이 깨질 때 사회풍조도 달라지고 개개인의 의식도 변한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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