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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유골 찾아 10년간 설악산 격전지 헤매는 현시천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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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탕탕, 피웅 피웅. " 탄알이 각종 금속성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폭우처럼 쏟아지는 포탄 세례.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초지 (草地) 는 시뻘건 핏빛으로 타올랐다.

포성이 잠잠해질 무렵 바위와 나뭇가지에 빨래처럼 걸려있는 전우들의 시신들. 일부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듯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갓 차출된 스물 한살의 현시천 (玄時天) 이병이 51년 5월에 겪은 설악산 989고지 전투는 '지옥' 그 자체였다.

70의 백발이 된 玄씨는 48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악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종전 (終戰) 까지 설악산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혼자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당시 玄씨가 소속됐던 보병 11사단 20연대 2대대 전우들중 아직도 1백86명이 실종자로 남아있다.

"989고지에서 숨을 거둔 전우들의 유골을 찾아 안장해 주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들을 버려두고 온 것이니까요. " 80년 대령으로 예편하고 부산에서 개인사업을 하던 玄씨가 전우들의 유골을 찾기 위해 설악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89년. 그 후 지금까지 1년에 3~4번꼴로 玄씨의 설악산행은 계속됐다.

"설악산만 들어서면 989고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딘지 알 수가 없네요. 오세암에서 서북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 같은데…. " 당시에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곤 없던 989고지가 쉽게 나타날 리 만무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보관된 '한국전쟁사료' 부터 전투의 실제 상황을 보고한 '전투상보' 까지 참조, 그 근방을 이잡듯 뒤졌으나 허사였다.

또 당시 중대장이던 복수덕 (98년 작고) 씨를 만나 함께 찾아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玄씨는 "만약 내가 해내지 못하더라도 지금까지 모은 자료만이라도 남겨두고 싶다" 면서 "내 청춘을 앗아간 6.25가 젊은 세대에게는 그저 지나간 과거로만 인식되는 게 안타까울 뿐" 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설악산 전투의 기억과 989고지를 찾는 과정을 적어 '설악산 격전지를 찾아 청봉에 서다' 라는 제목으로 소책자를 만들었다.

자료 정리를 위해 손수 '한글 97' 프로그램을 익혔다는 玄씨는 오대산 전투 등 설악산 이외 지역 전투를 다룬 '전적지 조사, 백두대간 종주기' 라는 다른 한권의 원고도 탈고했다.

"설악산 상공을 모터 패러글라이딩으로 날면 989고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요즘은 패러글라이딩까지 배운다" 는 玄씨는 이번 6.25에도 전우들의 안장식을 치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부산 =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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