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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96분 막무가내 ‘독설’… 서방 대표단들 자리 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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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 지도자(아래)가 23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연설 도중 미국 등 강대국들이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며 다른 나라들이 2등 국가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유엔 헌장집을 의장석 쪽으로 던지고 있다. 알리 트레키 유엔 총회 의장(전 리비아 외무장관·사진 위 오른쪽)이 날아오는 책자를 바라보고 있다. [뉴욕 AP=연합뉴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 지도자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등 강대국 위주의 국제질서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설하기 전, 또는 연설 도중 미국 등 주요 서방 대표단들은 자리를 비워 사실상 연설을 보이콧했다. 이 때문에 유엔 총회는 잠시 파행으로 진행됐다.

◆“안보리는 테러 이사회”=카다피는 이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주최국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연설했다. 카다피는 지난 40년간 리비아의 통치자였으나 유엔 총회 참석은 처음이다. 그는 갈색 베두인 전통의상 차림으로 연단에 섰다. 이때 유엔 총회장은 절반쯤 자리가 비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수전 라이스 유엔 주재 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뒤 총회장을 빠져 나갔다. 주요 유럽국 대표들도 자리를 비웠다. 카다피는 원고도 없이 간단한 메모만 보면서 1시간36분간이나 연설했다. 당초 배정된 15분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연설이 길어지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마저 자리를 떴다. 유엔 총회에서 가장 길게 연설한 지도자는 1960년 4시간29분간 연단을 점령했던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대통령이다.

카다피는 유엔헌장을 들어올린 뒤 일부 페이지를 찢으며 의장석 쪽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유엔이 거부권을 가진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의 전횡에 휘둘린다”며 “5개국이 나머지 나라들을 이등 국가로 경멸하는 만큼 안보리는 테러 이사회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다피는 “신종 플루가 군사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신종 생물무기가 아니냐” “오바마 대통령이 영구 집권해야 한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암살 배후를 규명해야 한다”는 등 황당한 발언을 쏟아내 폭소를 자아냈다. 카다피의 속사포 같은 아랍어를 장시간 통역하던 유엔 동시통역사는 기진맥진해 교체되기도 했다.

◆반미 쏟아낸 아마디네자드=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하는 미국에 대해 “힘없는 여성과 어린이를 적대시하는 점령자의 범죄들을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참전에 대해서는 “수천㎞ 떨어진 나라가 중동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과 유혈 충돌, 테러 등을 유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역시 “유엔이 5개 안보리 상임이사국 주도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며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제도를 없애는 등 근본적으로 유엔을 변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연설도 총회장의 절반이 빈 가운데 진행됐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던 일부 미 대표단도 반미 발언이 쏟아지자 퇴장했다. 마크 콘블로 유엔 주재 미 대표부 대변인은 그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또다시 증오가 가득하고, 공격적이며, 반유대인 발언을 쏟아내 실망스럽다”는 성명을 냈다.

아마디네자드는 그러나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연설한 오바마는 “유엔이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24일 자신이 의장으로서 주재하는 안보리 회의에서 이란 핵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 세 차례 안보리 제재를 받았으나 미국 등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 이란은 “핵을 평화적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며 핵무기 개발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미국서 냉대 받는 브라운=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4일 “오바마가 영국 총리실로부터 다섯 차례 이상 유엔 총회나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열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공식 회동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22일 밤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변화 정상회의 만찬회장에서 떠나려는 오바마를 붙잡고 걸으면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영 총리실은 "사실 무근”이라며 보도를 부인했다. 굳건한 동맹을 과시하던 미·영 관계는 로커비 테러범 사면 이후 꼬이고 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뉴욕행 미국 팬암 항공기를 폭파시켜 270명의 희생자를 낸 리비아 정보부 출신 압둘바시트 알미그라히를 사면해 미국의 비난을 샀다.

정재홍 기자

◆유엔 총회 연설 순서=관례상 브라질 대통령이 첫째, 주최국 국가 지도자가 둘째로 하게 돼 있다. 이후 연설 차례는 유엔 사무국 신청 순이다. 1~9회 때는 주최국 국가 지도자가 처음 연설했다. 그러나 1954년 10회 주최국이 첫 연설을 포기하자 브라질이 자원하면서 이후 가장 먼저 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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