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좌절·이적·퇴출 위기를 넘어…패자들의 유쾌한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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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들을 1등으로 꼽지 않았다.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음울했던 패자들이 유쾌한 반란을 일으켰다.

KIA 타이거즈가 24일 2009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했다. KIA는 이날 군산구장에서 히어로즈를 5-0으로 꺾고 남은 한 경기 결과에 상관 없이 1위를 결정지었다. 2007년 꼴찌, 지난해 6위에 그쳤던 KIA는 올 시즌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란 듯이 뒤엎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KIA가 정규시즌 1위에 오른 건 2001년 창단 후 처음이고, 전신 해태 시절을 포함하면 1997년 이후 12년 만이다. 조범현 감독을 비롯한 KIA의 우승 주역들은 저마다 야구인생의 벼랑 끝까지 몰렸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합작한 1위가 더욱 값진 이유다.

◆수렁에서 건진 최희섭과 김상현=KIA가 우승까지 내달린 원동력은 단연 최희섭(30)과 김상현(29)의 방망이다.

메이저리거 출신 최희섭은 4번타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07년 국내로 복귀한 최희섭은 그해 7홈런, 지난해 6홈런에 그치면서 덩치값(1m96㎝)을 하지 못했다. 잔 부상에 시달리며 2군에 머물 때가 많아 야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빅리거의 자존심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난겨울 최희섭은 “이대로 끝내면 아쉬움이 너무 많을 것 같다”며 매일 광주 무등산에 올랐다. 120㎏에 육박하던 체중을 15㎏ 이상 줄이며 빠르고 강한 근력을 되찾아 올 시즌 32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김상현은 4월 21일 LG에서 KIA로 이적하자마자 매서운 방망이를 휘둘러 홈런(36개), 타점(127개), 장타율(0.628) 등 3개 부문 1위에 올랐다.

◆이종범, 은퇴 위기에서 역전 홈런=KIA 최고참 이종범(39)은 올 시즌 타율 0.273, 홈런 6개, 도루 11개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그의 가치는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1990년대 최고 스타였던 이종범은 몇 해 전부터 겨울이면 은퇴 위기에 몰렸다. 2007년엔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조건으로 연봉이 5억원에서 2억원으로 깎였다. 지난겨울엔 연봉이 동결되는 대신 코치 해외연수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유니폼을 입고 뛰는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며 현역 생활을 고집했고, 팀과 함께 재기했다. 이종범과 함께 90년대 해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대진(35)도 개인 통산 100승째를 따내는 등 젊은 투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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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굴’에서 빛난 조범현의 힘=조 감독은 패자들에게서 잠재력을 끌어냈다. 팀 전력이 약했지만 FA(자유계약선수) 영입을 요청하지 않고 내부 경쟁을 유도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고참들을 과감하게 밀어내며 신예들을 전격 발탁했다. 21세 좌완 양현종이 선발 투수로, 19세 신인 안치홍은 주전급 2루수로 성장했다.

대신 조 감독은 리더십이 있는 이종범과 이대진은 최대한 예우하며 팀워크를 최우선 가치로 내걸었다. 조 감독은 “우리 선수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세밀한 플레이와 자신감이었다. 이를 극복한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조 감독도 실패에 익숙한 인물이다. 현역 시절 포수로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은퇴 후 쌍방울과 삼성에서 배터리코치를 하다 2003년 SK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첫해 준우승 포함, 4년간 두 차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러나 우승을 못한 죄로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몸을 낮춰 2007년 KIA 배터리코치를 맡은 그는 2008년 감독으로 승진한 뒤 2년 만에 KIA를 최강팀으로 만들었다. 감독으로서 첫 우승이기도 하다.

군산=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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