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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북핵 일괄타결안이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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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북핵 사태가 돌연 제재와 대결에서 대화와 협상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한·미 간 협의가 물 한 방울 샐 틈이 없을 만큼 긴밀해야 할 때다. 그래서 두 나라 관계자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우리는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한·미 간 공조에는 털끝만큼의 문제도 없으려니 믿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뉴욕에서 야심작으로 내놓은 북핵 해결안을 미국 정부가 냉소하고 외면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의 숨은 의도가 없다면 우리 외교안보 라인이 사전 협의에 태만했다는 의심이 든다.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긴은 오바마 정부의 패키지 딜과 기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북한의 핵폐기에 이르는 긴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 하나씩 주고받으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지금까지의 단계별 해결방식 대신 문제를 한꺼번에 타결하는 방식이다. 일괄타결의 핵심 부분은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 대북 경제지원이라는 가시적인 종착역이다. 북한의 체제안전은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으로 보장한다.

이 대통령의 제안은 한국의 의미 있는 대북 정책전환이다. 통일보다 북한의 경제성장이 우선적이라는 그의 말은 통일을 미루고 평화를 먼저 정착시킨다는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의 기본 철학과 같다. 보수적인 대통령의 대담한 발언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대북 강경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사실상의 흡수통일의 의지를 밝혔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통일이라면 대북지원도 북한의 경제를 키워서 통일 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된다. 안보장관들도 북핵은 남한을 겨냥한 것, 북한의 황강댐 물 방류는 의도적인 것, 김정일의 미소공세는 전술적인 변화에 불과한 것이라는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이 대통령의 뉴욕 발언은 이런 한국 정부 대북 강경자세 완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라는 중요한 의문은 남지만 적어도 한국 정부의 대북자세는 큰 전환기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의미 있는 동기에서 나온 이 대통령의 제안에 오바마 정부가 냉소적인 것은 충격적이다. 그건 그의 정책이다, 처음 듣는다, 너무 나갔다고 말한 국무부 대변인과 아태차관보의 말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데면데면한 반응이다. 외교부는 이 대통령의 일괄타결안을 미국대사관에 설명했는데 워싱턴의 고위층에 전달이 안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말이 안 된다. 캠벨은 이 대통령의 연설에 앞서 열린 유명환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에서도 일괄타결안 이야기가 없었다고 밝혔다. 외교부의 해명이 더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 때문에 이 대통령 제안의 타당성 논의가 뒷전으로 밀렸다. 이 대통령의 일괄타결안에는 장점과 약점이 하나씩 있다. 일괄타결안이 우리 대북 강경자세의 유턴을 의미하는 것이 장점이다. 최근 들어 북한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유엔과 미국의 제재로 북한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정일이 국정을 다시 장악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김정일은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을 북한으로 불러 미국 기자들을 넘겨주고, 현대아산 직원과 납북 선원들을 석방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때 조문사절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에 사실상의 특사를 보냈다. 김정일의 유화 제스처다.

일괄타결안의 약점은 그것이 비핵화 과정의 복잡한 성격에 비추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6자나 남·북·미 3자나 북·미 양자협상에서 저쪽의 핵 포기와 이쪽의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꺼번에 타결한다고 해도 그렇게 타결된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은 단계적일 수밖에 없다. 합의 이행의 매 단계는 북한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지연작전을 쓰고 합의를 어기고 몽니를 부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13 합의가 단계적 방식이라서 이행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북핵 불능화와 폐기의 두 단계 사이에서 검증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섣불리 다룬 결과다. 이 대통령의 일괄타결안이 한반도 비핵화에 결정적인 이정표를 세우려면 2·13 합의 이행 실패를 거울 삼아 미국의 패키지 딜과 한국의 그랜드 바긴을 묶은 타협안이 나와야 한다. 남북관계를 복원하여 북한에 줄 것은 주면서 북한 설득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북핵 해결에 주도권을 잡겠다고 설익은 제안을 남발하는 것은 편협하고 반실용적 정치행위다. 중요한 건 비핵화지 주도권이 아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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