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21세기 병원을 위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3시간 대기, 3분 진료' 라고 한다.

종합병원의 현실을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병원 이용자들 대부분은 이 말에 쉽게 공감할 것이다.

종합병원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일반의 인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복잡하고 낯선 행정절차, 직원들의 불친절, 무성의하게 보이는 간호사의 태도, 권위적이기만 한 의사들의 자세….

게다가 고통스러운 검사의 반복, 비싼 진료비 청구서, 의료사고 또는 환자 상태에 대한 무설명과 무책임 등 병원 이용자들을 짜증스럽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일들이 실제로 많이 있기 때문이다.

*** 영리추구 사업체 아니다

그러나 병원에 대한 '악인상' 을 결정적으로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돈벌이.영리 (營利).사업성만이 강조되는 듯한 모습들이다.

이는 병원 불신에 더하여 병원이 부도덕하다는 인상을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병원은 본래 그 기원이 '이익추구' 와는 전혀 무관한 곳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이웃 사랑의 계명에 근거해, 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로 시작된 곳이 병원이다.

중세 때 성지순례자들의 휴식처로,가난한 사람.병든 사람.노약자.고아.과부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집으로 병원이 운영돼 온 유래를 지닌다.

따라서 병원의 정신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버려진 외로운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로와 신체적 치유 등을 함께 주는 곳이어야 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장소여야 하는 것이지 돈벌이 목적의 사업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병원은 거듭 강조한다면,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건강을 회복 및 증진시킴으로써 삶의 행복을 찾아주는 데 목적을 둔 공익 (公益) 의 장소다.

결코 사익 (私益) 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다.

이러한 병원의 정신과 이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명시한 헌법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 건강증진과 진료발전에 합리적인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까지의 정부 의료정책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고 할 만큼 미흡한 수준이다.

오히려 민간부문의 병원들이 국가 예산에서 감당해야 할 국민의 건강증진과 진료의 몫을 다해온 것이다.

*** 병원발전 가로막는 정책

그런데도 병원은 의원급에서 대형 대학병원에 이르기까지 당국의 일관성 없는 의료정책과 의료전달 체계의 왜곡으로 마치 이익추구를 위한 '밥그릇 다툼' 을 하는 것처럼 매도 대상이 되기 일쑤였으며, 더러는 국민적 불만해소의 탈출구로 '병원 부조리' 가 비리척결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특히 정부는 비현실적인 보험수가 책정을 통해 생명보호를 위한 진료 발전은 도외시한 채 의료계를 정책적으로 통제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의료정책이 병원 발전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이 생명을 보호.치유하기 위해서는 진료기술과 서비스의 발전이 필수적이다.

21세기의 병원은 존경과 사랑으로 환자의 인권을 우선하는 '환자 중심의 진료 환경' 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경제성장에 따른 고급진료 수요에도 적절히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한 재투자와 진료비 상승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갈등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다.

한국의 의료보험 수가에 비교할 때 일본은 2배, 독일은 3배, 프랑스는 4.5배나 된다는 사실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21세기를 위한 재투자를

'환자의 생명 치료와 진료에서 얻은 것은 환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는 논리는 병원 운영의 철칙이다.

이익은 반드시 재투자돼야 한다.

재투자는 병원과 진료의 발전을 위해 환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일 뿐 결코 사익 추구가 아니다.

병원 자체의 정신과 이념이 철저히 공익이며, 더구나 고급스럽고 첨단적인 의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당위 (當爲) 이기 때문이다.

장덕필 가톨릭중앙의료원 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