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계의 교육개혁] 6. 대학은 기업의 연구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멜리사 바이러스가 미국 해병대의 중앙 컴퓨터까지 무력화시켰던 지난 3월말. 위기를 느낀 백악관은 카네기 멜론대의 컴퓨터 응급대응팀 (CERT)에 긴급구조를 요청했다.

CERT는 이틀만에 범인이 ALT - F11 서버 컴퓨터를 통해 처음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 연방수사국 (FBI) 컴퓨터범죄 전담팀은 이같은 단서를 토대로 결국 용의자를 뉴저지주 허름한 2층 방에서 체포, 재판에 넘길 수 있었다.

CERT는 미 정부와 학계의 최고 인터넷 보안 전문가들로 구성된 산학협동 연구팀. 이들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와 구체적인 연구결과는 모두 극비로 분류된다.

인터넷 보안과 침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자칫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카네기 멜론대는 강철왕 카네기가 세운 대학답게 62개 부속 연구센터가 모두 외부 자금 지원으로 굴러가고 있다.

듀언 애덤스 연구담당 부총장은 "CERT의 1년 예산 3천8백만달러 (약 4백10억원) 가운데 2천6백만달러는 미 국방부가, 1천2백만달러는 마이크로소프트사 등 민간기업들이 대고 있다" 고 말했다.

독일의 자동차회사 BMW에는 자체 연구실이 없다.

이 회사의 연구실은 아예 뮌헨대 안에 들어가 있다.

대학과 기업의 손잡기가 '산학협동' 차원을 넘어 서로 한몸이 되는 '산학일체'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의 캐빈디시 연구소는 지난해말 기존 제품보다 훨씬 얇고 가벼운 발광 (發光) 플라스틱 디스플레이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냈다.

당장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1천2백만파운드 (2백40억원) 의

기부금을 들고 영국으로 날아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와 유럽연합 (EU) 도 이 연구소에 돈을 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케임브리지의 벤처기업 모임 대표 로리 반 소모렌은 "요즘 산학협동은 부익부 빈익빈으로 흐르는 추세" 라며 "캐빈디시 연구소처럼 될성 부른 나무에는 집중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고 말했다.

97년 비즈니스 위크의 경영대학원 평가에서 2위에 오른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은 기업에서 기부금을 받는 대신 MBA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을 경영 컨설턴트로 파견한다.

이 대학원의 연간 예산 9천만달러 중 학생들의 등록금은 42.3%에 불과하고, 절반 이상이 기업 임원의 연수비 (27.1%) 와 기부금 (25.2%) 등 외부에서 수혈되는 자금이다.

자금운용 수법도 헤지펀드를 뺨치는 수준에 올라 이 대학원의 기부자산 시장가치는 1억2천4백80만달러이고, 매년 이자와 투자수익만 1천3백만달러에 이르고 있다.

일본도 21세기의 승부수를 산학협동에서 찾고 있다.

나가노 (長野) 현의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초전도공학연구소 (SRL) . 고온 초전도체를 이용해 시속 5백74㎞의 자기부상 고속열차 개발이 한창이다.

SRL은 통산성의 주도로 83개 기업과 주요 대학들이 손을 잡고 산학관 (産學官) 협동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SRL 내의 히타치 (日立) 사와 도쿄 (東京) 대 연구팀이 전력 소비량을 1백분의1로 줄일 수 있는 초전도 소재개발에 성공할 경우 고속열차의 도쿄~오사카 (大阪) 왕복이 현재의 3분의1 비용으로 가능해진다.

일본에서 '기술 복덕방' 이 유망 비즈니스로 떠오르는 것도 새로운 추세다.

대학 연구실에서 잠자고 있는 바이오 기술.통신.신소재 등 첨단특허를 민간기업에 파는 기술이전기관 (TLO) 이 바로 그것이다.

기술 중매쟁이 격이다.

도쿄대는 지난달 12일 인재 소개업체인 리크루트와 TLO 설립계약을 했다.

리크루트는 당장 미국 스탠퍼드대와 MIT에서 기술특허권 관리를 담당하는 닐스 라이마스를 스카우트, 도쿄대에 파견해 돈 될만한 특허 분류작업에 들어갔다.

"산학협동은 더이상 기업측의 자선 (慈善) 이 아닙니다. 대학은 부족한 자금을 구하고, 기업은 유망한 기술을 찾을 수 있는 공존공생이며, 이로 인해 막대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윈 - 윈' 게임이기도 하지요. " 라이마스의 이야기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말 TLO 설립을 합법화한 뒤 와세다 (早稻田) 대가 다이와 (大和) 종합연구소와 손잡았고, 쓰쿠바 (筑波) 대가 일본 최대의 벤처 캐피털인 자스코와 제휴하는 등 벌써 50여개의 TLO가 생겨났다.

지난 4월 미국 크라이슬러와 독일의 벤츠가 합병계약을 공식 체결한 직후 열린 첫 기자회견. 주르겐 슈렘프 공동회장은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대학을 만들겠다" 고 선언했다.

국적도 다르고 사풍 (社風) 도 다른 두 회사의 결합이 결국 파탄으로 이어질 것이란 시장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대학을 통한 공동 연구와 연수를 꾀하겠다는 얘기였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이미 1천6백개의 미국 기업이 기업 관련 대학을 만들었고, 포천지가 선정한 미국의 5백대 기업 가운데 40%가 사내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선진국 기업과 대학들은 이제 한 울타리 속에서 본격적으로 융해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