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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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9장 갯벌

마중 나와 준 사람도 없는 옌지 (延吉)에 도착한 것은 아침나절이었다. 하루 밤낮을 꼬박 기차여행에 시달린 셈이었다.

그러나 허난 (河南)에 있는 역사 (驛舍) 를 나서자마자, 거리의 상가에 게시된 한글 간판들 때문에 켜켜로 쌓여 있던 두려움들이 조금씩 희석되고 있었다.

여자가 운전하는 택시를 잡아 자전거의 물결로 뒤숭숭한 시내 한가운데로 나갔다. 택시기사가 내려준 곳은 옌지의 중심가를 가로질러 흐르는 뿌얼하퉁허 (버드나무숲이라는 뜻의 만주어) 라는 강 위에 놓여 있는 허난차오 (河南橋) 근처 조선족 아낙네가 경영하는 조그만 길가 식당이었다.

길가로 나서면, 옌지의 오랜 호텔인 바이산다샤 (白山大廈) 건물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식탁으로 나온 아침 식사는 단고기로 끓인 개장국이었다. 조여사가 소개해준 옌지의 거래선과 연락하는 일은 서둘지 않기로 했다. 뜨거운 국에 밥 한 그릇을 통째로 말아 게걸스럽게 퍼먹고 있는 봉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토록 게걸스럽던 봉환이가 느닷없이 수저질을 멈추고 마오쩌둥 (毛澤東) 의 사진이 걸린 맞은편 벽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괴이하게 여긴 태호가 팔로 봉환을 툭 치며 물었다.

"형, 먹다 말고 갑자기 왜 그래? 모택동 얼굴에 뭐 묻었어. " "여기와서 봉두로 뻑뻑하게 담은 고깃국을 퍼먹다보이 희숙이 생각이 억수로 나네. "

"엉뚱하긴, 그 사이에 형 버리고 도망쳤을까봐 그래?" "그 단새 어디로 내빼뿌기야 했을라마는 고깃국 먹다보이 결혼식 올리자마자, 도둑놈메치로 중국으로 내뺀 게 마음에 걸려서 심기가 편치 않다카이. 나도 목석이 아닌 이상, 마누라 생각 억수로 나는 게 정상 아이겠나. "

"형도 많이 변했군. 그게 정상이니까 많이 형수씨 생각해. 형 아니면, 누가 형수씨를 애틋하게 생각해 주겠어. " 해장국 한 그릇을 삽시간에 후딱 먹어치운 손씨는 담배를 피워 물며 거들었다.

"맑은 날에 백두산에 올라가면 안면도가 보일지도 모르지…. " "형님은 택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마소. 여기가 어디라고 안면도가 보인단 말입니껴. 안면도가 이마 밑에 붙어 있는 콧등인 줄 압니껴?" "그런 소리마. 인천에서 산동성에 닭이 홰치는 소리 들린다는 얘기 못 들었어?"

"사람 잡는 소리 그만 하소. 거리가 그마이 가찹다는 것을 뻥튀기하다 보이 얘기가 그렇게 된 기라요. 우리가 연길까지 달려온 목적이 뭔데, 기차 타면서부터 이때까지 입만 뻥긋했다카면 백두산타령만 늘어놔요? 언젠가는 한 번 가봐야 할 곳이지만, 발등에 떨어진 장삿속은 집어치우고 구경부터 할라카면 그기 본전 까먹자는 얘긴데, 일행중에 좌상인 형님이 철없이 알라들메치로 백두산 가자고 줄기차게 졸라대면 체면이 서겠습니껴? 조금 일찍 가고 늦게 가고가 무신 상관이겠습니껴. 백두산이 촐삭대기 좋아하는 노루새끼나 토끼 새낀줄 알아요? 우리가 늦게 가도 백두산은 거기 있을 기고, 일찍 가봐도 그 자리에 있는 게 몇십만년 전부터 있어온 백두산이라카는 깁니더. "

"아니 그러면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열일을 제쳐두고 맨 처음 해야 할 일이 백두산 가보는 게 아니란 얘기여? 연길하면 백두산이고 백두산하면 연길 아니든가?"

"누가 아이라 캤어요? 찬물도 선후가 있다캤듯이, 우리가 연길까지 온 목적이 배부른 놈들처럼 관광길로 오지 않은 이상,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 할 일이 있다는 얘기라요. 백두산이 뿌리째 뽑혀서 어디로 내빼뿌까봐 겁나서 그래요?"

"내가 그렇게 고집을 피워쌓는 동서 속셈을 모를 줄 알어?" "내 속셈이 뭔데요?" "나중에 처제하고 둘이서만, 백두산 살짝 가자는 속셈 아니면, 내 손구락에 장을 지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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