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역사왜곡 입다문 중국 지식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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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해 최근 중국에선 한가지 목소리만 들린다. "고구려는 중국 고대 중원 왕조의 부속 정권"이라는 기가 막힌 주장 하나다. 일부 중국 학자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싱가포르 연합조보(聯合早報)의 12일자엔 중국 학자 위원다(宇文達)의 글이 실렸다. 그는 "고구려사를 뻥튀기해 보도하는 한국 언론들 때문에 한국에서 편협한 민족주의가 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전혀 무의미한 고구려사 논쟁이 정부 차원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이 전통적으로 조공.책봉의 관계에 있었기에 고구려사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부속적인 위치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어설픈 주장까지 폈다. 소아병적인 대국주의의 편린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것은 중국의 지식인 사회다. 도대체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두 죽었는가. 중국 당국의 오류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누구 하나 나서 고구려는 한반도의 정권이라고 교과서에 써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중국사에 왜 다시 편입시키려는 것인지 그 이유를 따져 묻는 사람이 없다. 본지가 지난 11일 보도한 주다커(朱大可)의 역사 왜곡에 대한 경종의 소리가 고작이다. 중국 지식인에게 지식은 있을지언정 양식(良識)은 실종된 것인가. 아니면 중국의 통제된 지식 사회의 전통이 한.중 간의 고구려사 왜곡 논쟁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걸까.

한 나라의 힘은 알량한 국민소득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물건 몇 개 더 만들어 판다고 국가의 위엄이 서는 게 아니다. 그게 바로 중국이 일본을 향해 늘 하던 말이다. 그래서 중국은 진실과 도덕적인 가치를 앞세우며 일본의 역사왜곡을 나무라지 않았던가.

중국이 진정 아시아의 지도적인 국가로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싶다면 긴 호흡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주변국과의 관계를 세련되게 다듬고 정리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국이 가장 피해야 할 길은 중화주의적 패권주의의 길이다. 그건 결코 부흥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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